반복되는 역사②
관료제를 완성하려면 관리 임용 제도를 완비해야 한다. 종래의 임용 제도인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는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원래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위나라가 도입한 9품 중정제는 그 핵심인 중정이 부패한 인물일 경우에는 오히려 해가 많은 제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남북조시대에 귀족 세력은 9품 중정제를 악용해 세력을 키우고 관직을 기의 독점한 터였다. 귀족의 그런 전횡을 막으면서 더 합리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관리 임용 제도는 없는 걸까? 고민 끝에 절묘한 답이 나왔다. 바로 과거제였다.
관리 후보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서 고득점자를 관리로 선발하면 된다. 귀족의 자의적인 관리 임용을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험 점수는 객관적이므로 누구도 합리성을 의심할 수 없다. 당대에는 관리 임용 제도로서의 의미가 컸지만, 과거제는 이후 필답고사로 필요한 인력을 선발하는 동양 특유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의 대학입시, 각종 고시, 입사 시험과 승진 시험 등 시험과 관련된 모든 제도는 과거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과거제가 과연 겉으로 표방한 취지만큼 합리적인 제도인지는 이미 출범 당시에도, 또 이후에도 의문시되었다).
587년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과거제는 다른 제도들처럼 후속 왕조인 당 제국 시절에 꽃을 피웠으며, 이후 20세기 초 청 제국 말기까지 1500년 동안이나 중국의 기본적인 관리 임용 제도가 된다【관리 임용 제도는 대개 왕권 강화를 위해 실시되는 게 보통이다. 중국에서처럼 한반도에서도 그랬다. 우리 역사에서 9품 중정제와 비슷한 것으로는 788년에 신라의 원성왕이 시행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있다. 또 과거제는 958년 고려의 광종이 중국의 예를 좇아 처음 도입했다. 재미있는 것은, 신라의 원성왕과 고려의 광종 모두 왕권 강화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는 점이 신라의 원성왕은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광종은 고려 초 치열한 왕자의 난을 치르고 즉위했다】. 이와 같은 수의 관제와 과거제 이외에 남북조시대의 균전제와 부병제 등도 모두 당 제국에 그대로 이어졌다.
▲ 과거 시험장 수 문제가 처음으로 실시한 과거제는 이후 중국 역대 왕조의 관리 임용 제도가 되었다(한반도에서도 고려 초에 광종이 처음 도입했다). 그림은 과거제가 가장 활성화되었던 송대의 과거 시험장의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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