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사회의 일원으로④
만반의 태세를 갖춘 근초고왕(近肖古王)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다. 369년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331~371)이 직접 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향해 남침해 온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정된 사건이고 튼튼히 대비를 해두었으니 백제로서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지금의 황해도 백천에 주둔한 고구려군을 맞아 근초고왕은 우선 태자를 보내 공격하게 한다. 그로서는 고구려의 힘을 한 번 테스트해본다는 심정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결과는 예상 외로 백제의 승리였다. 이 전쟁으로 백제는 고구려 군 5천 명을 포로로 잡고 고구려의 남침 야욕을 꺾었다.
고구려와의 사상 첫 접전에서 완승을 거둔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자신감을 얻은 반면 승리를 낙관했던 고국원왕은 당황했다. 굳어진 확신과 싹트는 회의, 결국 이 차이가 최종 승부를 갈랐다. 2년 뒤 고국원왕은 다시 남진에 나섰으나 일취월장하는 백제의 힘은 2년 전과도 또 달랐다. 예성강에서 매복 작전으로 서전을 승리한 근초고왕은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직접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본토 공격에 나섰다. 선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퇴만 거듭하게 된 고국원왕(故國原王)은 수도 평양까지 추격해 온 백제군에게 화살을 맞아 전사하는 비운의 최후를 맞는다(앞서 말한 대로 당시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압록강 남쪽이었으니 백제군이 어디까지 북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고국원왕이 고국에 바친 마지막 기여는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다. 고구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고국원왕이 죽자 백제군은 그 성과에 만족하고 철수를 한다. 그때 백제가 끝까지 고구려의 목을 조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답을 추측하기 어려운 가정이지만 근초고왕이 조금만 더 욕심을 냈더라면 왕을 잃은 고구려는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동천왕(東川王)도 위나라에게 몰려 수백 리 산길을 달아났지만, 그래도 목숨을 부지한 탓에 재건에 성공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그 정도로도 대만족이었다. 오히려 그는 몇 차례나 완승을 거두었음에도 여전히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수도로 귀환한 직후 그가 맨먼저 한 일은 고구려의 보복에 대비해서 평지에 있던 도성을 버리고 인근의 남한산에 산성을 쌓아 천도한 것이었다. 남한산성은 7세기에 신라 문무왕이 쌓고 조선시대에 증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마 문무왕 시대에도 근초고왕이 쌓은 백제의 옛 도성을 토대로 했을 것이다.
▲ 하사냐, 조공이냐 근초고왕 때 백제는 처음으로 일본과 정식 상견례를 나누었다. 그 기념일까? 근초고왕은 사진에 나온 칠지도(七支刀)라는 칼을 일본 왕에게 주었다고 한다. 날이 일곱 개라서 역사가들은 칠지도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칼의 몸체에 백제가 일본에게 준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역사가들은 백제가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 역사가들은 백제왕이 하사한 것이라고 맞섰다. 당시에는 그냥 두 나라의 수교를 축하하는 기념품이었을 텐데, 쓸데없이 지금 와서 열을 올리는 격이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