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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2장 깨어나는 남쪽,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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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2장 깨어나는 남쪽,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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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모처럼만에 왕통을 바로잡은 탓에 비류왕(比流王)은 외정(外征)보다 내치에 주력하면서 왕권을 다지기에 힘쓴다. 아마도 그가 재임한 40년 동안 백제의 백성들은 역대 어느 시절보다도 태평한 세월을 누렸으리라(그 기간 한 차례 반란 사건 이외에는 전쟁을 벌인 기록도 없다).

 

그러나 한반도 중서부에 자리잡은 백제는 마냥 그런 태평성대를 향유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백제의 지배층도 그런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정중동(靜中動)! ‘()’의 시기에 ()’을 준비하지 않으면 장차 다가올 것은 동에 그치는 게 아니라 화()가 될 것이다. 그 준비의 첫째는 후방 다지기이고, 그 후방 다지기의 첫째는 신라와의 관계 개선이다. 그래서 322년에 비류왕은 신라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다. 곧이어 신라도 사신을 보내오면서 두 나라는 사실상 정식 수교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과거에도 두 나라 사이에 유화적 분위기가 감돈 적은 간혹 있었지만 모두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에 비해 이번은 상당 기간 지속적인 관계가 될 전망이다.

 

건국 이후 줄창 크고작은 싸움으로만 일관해 온 두 나라가 갑자기 왜 그랬을까?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공동의 이해관계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동의 이해관계가 생긴 이유는 공동의 적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적이란 바로 북쪽의 고구려다.

 

낙랑이라는 완충지가 사라진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 중남부를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까지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서쪽의 대륙 정세에만 골몰해 있었던 고구려, 그러나 생존의 단계를 넘어 팽창의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한 고구려의 눈에 처음으로 한반도 중남부, 그리고 그곳에 자리잡은 백제와 신라 두 나라가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북방의 사태 변화는 자기 지역의 문제에만 집착해 왔던 백제와 신라에게 처음으로 국제 정세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기에 족했다. 두 나라는 이제 우물 밖의 세상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두 나라의 접근은 필연적이다.

 

비류왕(比流王)의 후방 다지기에서 둘째 과제는 아직도 전라도 일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마한의 숨통을 완전히 끊는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제는 늙은 비류왕의 몫이 아니라 그의 아들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의 몫이 된다비류왕은 고이왕 계열의 세력과 원한을 덧쌓지 않고 타협을 이룬 듯하다. 왜냐하면 344년 그가 죽자 그의 아들 대신 분서왕의 아들인 계왕(契王, 재위 344 ~ 346)이 잠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분서왕이 죽었을 때 계왕은 나이가 어려 비류왕에게 왕위를 양보한 바 있었으니 두 정치 세력은 아마 그때 평화 협상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왕이 3년 만에 죽고 비류의 아들 근초고가 왕위를 잇는 것으로 두 계파의 문제는 사라졌고 이후 백제의 왕통은 다시 왕계의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로 2세기 이후 사실상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마한은 한반도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한다. 그러나 근초고왕을 백제의 역대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로 만들어 준 사건은 마한 정복이 아니다. 아버지 비류왕(比流王) 때부터 그랬듯이 이제 백제에게 중요한 방향은 남쪽이나 동쪽이 아니라 북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한 정복은 본 과제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 과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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