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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3장 통일의 무대, 두번째 멸망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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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3장 통일의 무대, 두번째 멸망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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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멸망

 

 

일본에서 출발할 새 왕에게 또 다른 선물을 주기 위해설까? 아니면 오히려 부여풍을 이름만의 왕으로 제한하려는 예비 공작일까? 자신을 얻은 복신은 수도 탈환을 계획한다. 이미 백제의 유민들이 속속들이 합류해 오면서 백제 부흥군은 3만의 병력으로 늘어났다. 한편 당과 신라 입장에서는 사비성까지 내주면 그동안 공들인 백제 정벌 자체가 수포로 돌아갈 터이다. 그래서 웅진도독(‘당 군정청의 장관격이다)인 유인궤(劉仁軌)는 일단 다른 곳들은 제쳐두고 전 병력을 당의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사비성으로 집결시켜 방어에 나선다. 이쯤 되면 누가 정벌군이고 누가 방어군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은 도성을 포위하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함락시킬 힘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유인궤가 이끄는 지원군이 후방을 공략하자 사비성 탈환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이동해 임존성(지금의 예산 부근)으로 갔다. 마침 임존성은 백제의 달솔이었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근거지로 삼고 이미 독자적인 부흥 운동을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비록 옛 도성을 수복하지는 못했지만 이제 부흥군은 옛 백제의 북서 방면에 자리잡고 200여 개의 성을 장악함으로써 반란군이 아니라 어엿한 정부군이 되었다. 게다가 662년에는 드디어 부여풍이 170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일본에서 금의환향했다. 백제가 부활했다! 그런 자신감에서 도침은 유인궤가 보낸 사신을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돌려보내는 여유까지 보인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다. 부활한 백제가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 싶더니 곧바로 권력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복신은 도침이 왕처럼 구는 게 영 못마땅하다. 게다가 그는 도침과 달리 유인궤와 타협해야만 부활한 백제가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사적인 권력욕이 명분과 손을 잡자 그는 거리낌없이 동지였던 도침을 살해한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완전히 잘못이었다.

 

애시당초 백제에게 겁을 주고 복속시키는 선에서 만족할 심산이었다면 굳이 13만의 당나라 대군이 황해를 건너올 필요도 없었다. 즉 그들의 임무는 백제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부흥군에게 당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라측과 연결된 보급로가 끊겼기 때문이었다(백제 부흥 세력은 백제의 북서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복신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보급로의 요지인 진현성(眞峴城)의 수비를 보강했으나 이미 그의 마음 속에 뚫려 있는 허점까지 보강하지는 못했다. 유인궤는 집요한 공격으로 진현성을 함락시켜 마침내 군량 보급로를 확보했다. 이제는 역공에 나설 차례다.

 

자신의 판단미스로 결정적인 실패를 겪고서도 복신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될 것만을 걱정한다. 그래서 그는 병이 든 것처럼 가장하고 대권 도전자인 부여풍(명목상으로는 대권 소유자였지만)이 문병을 오면 죽일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속셈을 알아챈 부여풍이 오히려 선수를 쳐서 복신을 죽이고 이름만의 왕에서 벗어난다. 이래저래 백제의 부활은 물거품이 될 조짐이 짙어졌다.

 

당군이 총공세로 나오자 부여풍은 고구려와 일본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으나 구원투수는 마운드에 오르기도 전에 가로막혀 버렸다. 믿을 것은 오로지 일본에서 온 400척의 함선이었는데, 그들 역시 백강 하구에서 당군의 공격을 받아 모조리 침몰해 버린 것이다(삼국사기에는 당시 하늘과 바닷물이 모두 빨개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쓸 수 있는 카드를 모두 쓴 부여풍은 도망쳤으며(이후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3년 만에 또 다시 왕을 잃은 부흥군은 이제 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약삭빠른 흑치상지는 홀로 남은 임존성(任存城)을 지킬 자신도 없고 또 지켜봤자 얼마 못 가리라는 판단에서 당군에 투항했고, 홀로 남은 임존성에 홀로 남아 저항하던 지수신(遲受信)은 동료인 흑치상지가 공격해 오자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렇게 해서 663년에 백제는 다시 한번 멸망하는 얄궂은 운명을 겪었다.

 

 

 영욕의 산성 700년에 가까운 백제의 사직은 왕실이 항복했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사진은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항전 장소였던 충남 예산의 임존성이다. 흑치상지가 거병했고, 나중에는 배반한 흑치상지를 맞아 지수신이 항거했던 이곳은 백제의 영욕을 상징하듯이 지금은 풀만 무성하고 성곽의 흔적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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