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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고구려의 성장통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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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부 깨어나는 역사 - 왕조시대의 개막, 고구려의 성장통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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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성장통

 

 

대외적 성공으로 한껏 주가를 높인 수성의 경우가 그랬다. 랴오둥을 정벌한 혁혁한 전공을 바탕으로 그는 형인 태조왕을 능가하는 인기와 권력을 누리면서 내치에도 일일이 간섭하게 된다. 여기에는 아마 칠순을 훨씬 넘은 늙은 형의 말없는 양보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수성은 오랜 2인자의 생활을 겪은 뒤에 맛보는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있었다. 용맹과 포악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걸까?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군인이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걸까? 전장에서 더없이 용맹했던 수성은 권력자가 되자 곧바로 포악한 심성을 드러냈다.

 

형은 혈육의 처지였으니 동생이 하는 일을 그냥 봐넘겼겠지만 태조왕의 신하들은 그럴 수 없었다. 수성이 사실상의 왕으로 처신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 태조왕의 우보 고복장은 이윽고 146년에 태조왕에게 수성을 제거하자는 건의를 한다. 그러나 태조왕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혈육도 혈육이지만 이미 그의 나이는 한 세기를 1년 앞둔 아흔 아홉 살이었다. 그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아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다. 하긴, 그 아우도 이제 일흔다섯의 노인이었으니. 그러나 백 세 노인은 박수칠 때 떠났다고 자부했을지 모르지만 아직 혈기왕성한(?) 칠순 노인의 생각은 달랐다. 실권이야 원래부터 지녔고 이제는 명함상으로도 왕이 된 수성, 즉 차대왕(次大王, 재위 146~165)은 반대파를 모조리 제거해야만 마음을 놓을 만큼 불안한 심정이었다. 결국 그는 일을 저지른다. 고복장을 죽인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태조왕의 두 아들마저 제거한 것은 도를 넘어선 만행이었다. 아직 대외적인 성공에 비해 대내적으로 왕권이 확실히 안정되지 못한 시기였으니 귀족들이 그 사태를 그냥 넘어갈 리 없다. 결국 165년에 귀족의 리더였던 명림답부(明臨答夫, 67 ~179)가 차대왕을 살해하고 그의 동생 백고를 왕위에 옹립하니 그가 신대왕(新大王, 재위 165~179)이다. 그 공로로 당시 이미 98세였던 명림답부는 오늘날의 국무총리격인 국상에 임명되어 113세까지 권력을 누리면서 쿠데타의 단맛을 흠뻑 즐겼다.

 

한창 뻗어나야 할 시기에 자꾸 내정 불안에 발목이 잡히는 고구려, 그러나 고구려의 성장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6대 태조왕부터 8대 신대왕까지 고구려의 왕계는 벌써 100년이 넘도록 연속해서 형제에게로 이어지고 있다형제 상속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고대에는 부자 상속이 훨씬 진보적인 왕위계승 방식이다. 물론 전 왕의 아들보다 동생이 나이도 더 많고 경륜도 풍부할 테니 왕위계승에 더 적임자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왕통이 직계로 이어진다는 것은 곧 그만큼 왕권이 강력하다는 것을 뜻한다. 형제와 같은 방계로 왕통이 이어질 경우에는 우선 계속 왕위를 이어가야 할 형제가 결국에는 없어지고 만다. 게다가 형제를 왕으로 옹립하는 과정에서 귀족들의 간섭과 입김이 작용하게 되므로 그만큼 왕권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실 이 과정의 연대에는 큰 문제점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85쪽에서 백제, 신라의 경우와 한데 묶어 살펴보기로 하자).

 

신대왕은 죽은 형의 아들을 관직에 등용하는 회유책으로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한편, 왕위의 부자 상속제를 공포함으로써 왕통을 둘러싼 더 이상의 잡음을 없애려 했지만, 해묵은 난제였던 만큼 권력 승계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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