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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2장 깨어나는 남쪽, 백제의 도약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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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2장 깨어나는 남쪽, 백제의 도약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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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도약

 

 

어쨌든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략하기에 이르렀다면 신라의 국력도 크게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 3만이라는 엄청난 대군이 실제로 동원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상당한 규모였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과연 간헐적으로 조우했던 100년 전과는 달리 백제와 신라는 2세기 중반부터 치열한 다툼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삼국사기에도 이 무렵부터는 초기에 두 나라를 괴롭혔던 말갈 같은 외부 세력이 등장하지 않고 거의 두 나라의 관계만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실상 전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백제가 일방적으로 신라를 침공하고 신라는 방어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백제는 신라를 압도하지 못했고 신라도 역시 크게 패배하거나 뒤로 밀려나는 일 없이 잘 버티었으나, 공격과 수비가 분명히 나누어진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아무래도 공격 측에 더 후한 점수를 주어야 할 듯싶다. 바꿔 말해 당시 백제와 신라의 힘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생존의 단계를 넘어 한창 뻗어나가는 팽창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신라는 아직 생존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런 두 나라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실이 하나 있다. 243년 정월에 백제의 고이왕(古爾王, 재위 234~286)은 커다란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낸다(제사라니까 혹시 대단치 않은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나 고대국가에서 제사라면 가장 큰 국가적 행사다). 그 전에도 백제의 왕실에서는 아마 여러 가지 제사 의식을 거행했겠지만 기록에 나오는 것은 이게 처음일뿐더러 특히 주목할 것은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냈다는 점이다. 하늘과 땅과 산과 강, 그 중에서도 특히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백제가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 오늘날로 치면 주권을 지닌 독립국이 되었음을 뜻한다. 건국한 지 200여년이 지나 비로소 백제는 명실상부한 왕국이 된 셈이다(고이왕이 천지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관제를 정비한 데는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다). 그 반면에 신라는 새 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여러 차례 전하는데, 제사 장소는 시조묘로만 국한된다(고구려는 천제와 시조제를 함께 지냈다). 같은 제사이고 국가적인 대행사지만 하늘에 제사를 지낸 백제에 비해 건국시조를 제사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신라가 여전히 부족국가의 체질을 완전히 벗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도성으로 사용된 토성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 삼국 가운데 가장 혜안이 있었던 나라는 백제다. ? 전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서울 강남에 도읍을 정했으니까. 위 사진은 당시 백제의 도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몽촌토성이고, 아래는 몽촌토성의 목책이다. 도성에 어울리지 않게 흙으로 쌓은 토성이지만 한강 유역에 쓸 만한 석재가 없었을 테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결과다. 쌓은 시기는 3세기로 추정되니 아마 고이왕 시대쯤 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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