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건 외교뿐④
그래도 아신왕(阿莘王)은 자신의 죽음으로 백제에 한 가지 선물을 남겼다. 그의 죽음은 백제와 일본 두 나라의 관계를 더욱 두텁게 만드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인즉슨 이렇다. 태자가 국내에 없는 탓에 일단 태자가 귀국할 때까지 아신왕(阿莘王)의 동생인 훈해(訓解)가 섭정을 맡았다. 그런데 왕위에 뜻을 품은 막내동생 설례(碟禮)가 형을 죽이고 조카가 계승할 지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는 태자에게 일본 왕은 100명의 군사를 붙여준다. 태자가 일단 사태 관망을 위해 해안 부근의 섬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 쿠데타에 반대한 대신들의 손에 설례가 죽는다. 이렇게 해서 태자는 어렵사리 왕위를 되찾고 전지왕(腆支王, 재위 405 ~420)이 되었는데, 자신을 보호해준 일본 측에 고마워했을 것은 당연하다. 이래저래 백제와 일본은 더욱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뒤늦게 중국의 동진은 전지왕을 책봉한다느니 하면서 수선을 떨지만 백제가 더욱 친밀감을 느끼는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일본이다【416년에 동진의 안제(安帝)는 전지왕에게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이라는 거창한 직책을 내렸는데, 쉽게 말하면 ‘중국의 동쪽 변방을 담당하는 책임자’라는 뜻이다. 백제에게 필요한 군사적 도움을 주기는커녕 정치적 영향력조차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북중국의 ‘오랑캐’들로부터 자신의 안위마저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백제왕에게 그런 벼슬을 내렸으니, 중국 황제의 배짱(?)도 어지간하다 하겠다. 현실이 어떠하든 명분상으로 서열을 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중국 한족 왕조의 고유한 중화 사상이며, 유학에서 비롯된 정치 이데올로기다. 당시 중국의 왕조들은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한반도의 군주들에게 관작을 주고 책봉했다. 참고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은 400년에 후연의 왕에게 ‘平州牧遙東帶方二國王’으로 책봉되었고, 435년 장수왕은 북연에 스스로 책봉을 청해 ‘都督遙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遙東郡開國公高句麗王’이라는 직책을 얻었는데, 뜻은 전지왕의 직함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중국에 대해 깍듯한 예의를 잃지 않는다. 일본이 허물없는 친구라면 중국은 부모 격이다. 누가 현실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될지는 뻔하지만 필요없다고 해서 부모를 버리는 사람은 없다. 백제는 그런 심정으로 당장에 별 쓸모도 없는 중국에게 최대한 예우를 갖춰 대한다. 장차 한반도 역사 1500년을 좌우할 사대(事大)라는 독특한 대중국 관계는 여기서 싹튼다. 이 점에 관해서는 고구려도 마찬가지였고 나중에 신라는 그보다 한술 더 뜨게 되는데, 민족적 혈통과 언어가 판이하게 다른 나라를 단지 대국이라 해서 이처럼 지극 정성으로 섬기는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대단히 희귀한 경우다(중국 주변의 민족들은 모두 중국 중심의 질서를 인정했으나 한반도 왕조들처럼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 경우는 없었다). 동진이 곧 무너지고 남중국의 주인이 송(宋)나라로 바뀌고 난 다음에도 백제의 사대는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곧이어 장수왕의 고구려군이 코앞에 닥칠 무렵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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