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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불세출의 정복군주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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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불세출의 정복군주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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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정복군주

 

 

덕분에 광개토왕(廣開土王)은 무려 1500년이나 지나서야 마땅한 평가를 받게 되지만, 어쨌든 묘호에 가장 어울리는 정복군주임에는 틀림없다. ‘광개토를 향한 그의 첫번째 사업은 단연 백제를 정벌하는 일이다. 광개토왕의 어깨에 걸린 아버지(고국양왕)와 큰아버지(소수림왕)의 야망, 할아버지(고국원왕)의 복수는 모두 백제를 타깃으로 하고 있다. 약관의 젊은 나이인 광개토왕에게 그 어깨 위의 짐은 부담이 아니라 추동력이다. 즉위 이듬해에 그는 백제의 북변을 공략해서 황해도 일대를 수복한다. 특히 강화도의 관미성을 함락시킨 것은 후속 사업을 위한 결정적인 교두보가 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백제의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은 예성강 전선에서 도전해봤지만 해안 일대를 빼앗긴 상황에서 그건 전략상의 미스를 넘어 자살 행위였다. 여기서 백제는 무려 8천 명이나 전사하는 치명타를 입는다. 백제의 반격을 손쉽게 제압한 광개토왕(廣開土王)396년에 2차 정벌을 계획하는데, 놀랍게도 여기에는 수군이 동원된다.

 

수군을 이용한다는 발상은 그 전까지 서쪽의 중국과도, 남쪽의 백제와도 늘 육군으로만 싸워왔던 고구려로서도 처음 구사하는 전술이었으니 당하는 백제로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비록 함선을 이용해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병력 수송의 수단으로 배를 이용하는 정도였긴 하지만, 광개토왕은 강화도에 전진기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을 십분 활용할 줄 아는 뛰어난 안목의 전략가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때이른 인천 상륙작전에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은 낭패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백제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인 위례성을 유린당하고 광개토왕 앞에서 영원한 노예가 될 것을 서약하는 치욕까지 겪는다.

 

비록 아신왕을 백제판 고국원왕(故國原王)으로까지 만들지는 못했지만 광개토왕(廣開土王)으로서는 3대째 묵은 빚을 후련하게 갚았다. 항복한 적장을 죽일 수는 없는 일, 그는 아신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볼모로 잡아가는 선에서 백제 정벌을 마무리짓는다. 신라를 복속하고 백제의 항복을 받았다면, 이것으로 고구려는 사실상 삼국통일을 이루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오늘날 우리는 흔히 고구려의 전성기 때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만약 광개토왕이 삼국통일을 이루었더라면 이후 중국에 대한 사대의 역사도 달라졌을 테고 오늘날 우리나라의 영토도 더욱 넓어졌으리라는 것이다(신채호나 함석헌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오늘의 관점일 뿐이다. 굳이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로 말하자면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사실 삼국통일을 이룬 셈이다. 백제와 신라는 모두 고구려를 상국으로 받드는 처지가 되었으니 굳이 더 이상 정벌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고구려의 관점에서는 백제와 신라를 동급으로 여기지 않았으므로 삼국통일이라는 것을 과제로 설정할 이유가 없었다. 광개토왕은 두 나라를 제후국쯤으로 여기고 제압하는 선에서 만족했을 것이며, 당시의 정황에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만주에서 한반도 남부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단일한 정치 체제로 아우를 수는 없었으니까. 이점에서도 고구려는 한반도형 왕국이라기보다 중국형 제국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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