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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불세출의 정복군주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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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불세출의 정복군주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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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정복군주

 

 

북방의 모든 사태가 일단락되자 이제 고구려는 본격적인 남행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미천왕(美川王)의 낙랑 정벌 이후 70여 년 만에 홀가분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남쪽이다. 여유가 생겼으니 전과 달리 전

투에 급급하지 않고 큰 전략부터 구상할 수 있다. 그래서 고국양왕(故國壤王)은 먼저 신라를 백제에게서 분리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일에는 군대를 파견할 필요조차 없다. 그저 사신을 보내 핍박하는 것으로 신라의 내물왕은 조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백제와의 인연을 끊겠다고 서약한 것이다사실 백제 비류왕(比流王)이 신라와 화친을 맺을 때도 신라의 힘에 의지해서 고구려를 치고자 한 의도는 아니었다. 고이왕(古爾王) 때도 백제는 혼자 힘으로 대방과 낙랑 남부를 장악했고 근초고왕(近肖古王) 역시 신라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고구려를 무찔렀다. 따라서 백제는 신라와 지속적인 동맹을 맺으려 했다기보다는 고구려 공격에 집중하기 위해 신라와의 사소한 분쟁을 중단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봐야 한다(두 나라가 정식으로 동맹을 맺게 되는 때는 장수왕이 남진 드라이브를 거는 433년이다). 이렇듯 격변하는 한반도 정세에서 아직 신라는 거의 실질적인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할 만큼 힘이 약했다. 고국양왕(故國壤王)이 외교적 수단으로 신라를 복속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가 신라에 대해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품었다면 사신 대신 군대를 보냈을 테니까.

 

고국양왕이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그 다음 수순은 당연히 백제 공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라를 복속시킨 것을 마지막 치적으로 남기고 그 해(391)에 죽는다. 고구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그의 또 다른 중요한 치적이 효력을 발휘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5년 전에 그가 태자로 책봉했던 아들 담덕(談德)이 열일곱 살로 자라나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담덕, 그가 바로 불세출의 정복군주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 ~ 412)이다.

 

1880년 고구려의 옛 수도인 지안(集安) 부근에서 한 거대한 비석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 우리는 광개토왕이 왜 그렇게 거창한 묘호(廟號)묘호란 왕이 죽은 다음에 붙이는 시호(諡號)를 가리킨다(시호는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필요하므로 왕만이 아니라 귀족이나 관료들도 죽은 뒤에는 시호가 정해진다). 역사에서는 편의상 고대의 왕들을 시호로 부르지만, 실상 그것은 왕이 죽은 뒤에 붙인 이름이다. 따라서 그 왕들이 재위하던 시대에는 왕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를테면 광개토왕은 아마 담덕왕쯤으로 불렸을 것이다. 참고로, ()이나 조()로 끝나는 고려와 조선의 왕들도 모두 묘호이므로 재위하던 때에 불렸던 이름이 아니다를 받았는지(‘광개토란 영토를 크게 개척했다는 뜻이다), 또 영락(永樂)이라는 호방한 연호를 제정했는지(그 전에도 고구려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우리 역사상 알려진 최초의 연호는 영락이다)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광개토왕릉비의 존재를 몰랐던 아울러 금석문에 관한 지식이 - 전무했던 김부식(金富軾)삼국사기에는 광개토왕(廣開土王)에 관한 기사가 불과 한 쪽에 그칠 만큼 대단히 약소하다. 사실 그 비석은 높이 6미터가 넘는 것이었으니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다만 7세기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한반도에 들어선 어느 왕조도 압록강 바로 북쪽에 있는 지안까지 영토로 삼지 못했기에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다(조선의 세종 때 오늘날의 국경에 해당하는 압록강까지 영토를 넓혔으나 그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17세기부터는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을 정복한 청나라가 자신들의 고향을 성지로 만들어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지하는 바람에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는 더욱더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 그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 오래 전부터 그 비석에 관해 알고 있었겠지만, 정확한 조사가 없었으므로 한동안은 심지어 그것을 청나라 시조의 비석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광개토왕과 주몽에 관한 오해 정복군주라는 위명 때문인지 광개토왕(廣開土王)에 관해서는 흔히 중국을 위협한 영웅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가 영웅이라는 데는 토를 달 필요가 없겠지만, 사실 그는 대중국 전선에 대해서는 랴오둥의 소유를 승인받는 정도로 만족했을 뿐이고 한반도 남쪽 경략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사진은 광개토왕릉비 첫 부분의 탁본인데, 오른쪽 상단에 고구려의 건국자를 주몽(朱蒙)이 아니라 추모(鄒牟)’라고 새긴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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