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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새로운 동맹(의자왕, 여제동맹, 영류왕, 천리장성)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새로운 동맹(의자왕, 여제동맹, 영류왕, 천리장성)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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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동맹

 

 

백제 무왕(武王)은 아마 당나라와 고구려, 신라를 놓고 한참 저울질을 했던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백제는 그 세 나라와 모두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당나라는 언제든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래야 할 대상이고, 고구려와는 신라에게 영토를 빼앗겼다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으며, 신라와는 진평왕(眞平王)과의 친분이 있다. 그래서 그는 세 나라를 모두 확실한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다. 그런 대치 국면이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훌륭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동북아 정세는 마냥 그렇게 전개될 수 없었다. 특히 태풍의 핵과 같은 당나라가 곧 안정을 찾으면 언제든지 한반도를 복속시키려 들 것이며, 그때 가서는 백제도 어떻게든 분명한 노선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무왕은 안개 정국 속에서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은 달랐다.

 

의자왕 시대에 이르자 비로소 안개가 어느 정도 걷혔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탓에 해동의 증자(曾子, 공자의 제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의자왕의 두뇌는 분주하게 돌아갔다. 우선 진평왕(眞平王)무왕(武王)이 모두 죽었으니 신라와는 이제 아무런 연고도 없다. 게다가 당나라는 한반도 왕조들에게 계속 현상유지를 주문하지만, 그건 신라의 기득권을 보장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백제로서 할 일은 중국이 안정되기 전에 미리 선수를 쳐서 옛날의 한반도 지도를 복원시켜놓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외교를 통해 당나라의 승인을 얻으면 된다. 문제는 고구려인데, 실지 수복에 관한 한 고구려는 동병상련의 처지이므로 최소한 중립화할 수 있거나 아예 동맹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타깃은 신라로 정해진다. 이런 판단에서 의자왕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 공격에 나서서 순식간에 40여 개 성을 획득한다. 그 마무리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앞에 말한 윤충의 대야성 전투였다.

 

그 이듬해 의자왕(義慈王)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드디어 원하던 동맹을 맺는데, 이른바 여제동맹(麗濟同盟)이다. 이런 사정이었으니 김춘추의 고구려 외교가 성공할 리 만무했다. 그런데 고구려가 의자왕이 내미는 손을 굳게 맞잡은 데는 마침 내부 권력 구도가 크게 변한 탓이기도 했다.

 

 

 

 

고구려에서는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낸 영양왕(嬰陽王)618년에 죽자 수나라와의 대회전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더불어 구국의 영웅이었던 건무(建武)가 영류왕(營留王, 재위 618~642)으로 즉위했다. 때마침 자신이 즉위한 그 해에 중국에서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으니 영류왕으로선 신흥제국에 유감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집권 초기에 그는 적극적으로 당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한다. 그 일환으로 당 고조 이연(李淵)의 요청에 따라 만여 명에 달하는 중국 포로들도 송환시켰고, 624년에는 당나라로부터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을 수입하고 도사들을 초빙해 시리즈 특강도 하게 했다도가 사상은 원래 남북조시대에 크게 성행했는데 당나라 초기에는 정부의 특별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당나라는 수나라에서 명패만 바꾸었을 뿐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북 출신의 왕조인 데다 수 나라 황실의 양씨와는 친족 간이었으니 우선 관료와 백성들이 두 나라를 다르게 보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를 느낀 이연(李淵)은 도가의 창시자인 노자(老子)가 이씨였다는 점에 착안해서 노자를 자신의 시조라고 우겼다. 터무니없는 주장이었지만 어쨌든 정부의 대대적인 선전 덕분에 도가는 힘을 얻었고 그 결과 고구려에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무왕(武王)진평왕(眞平王)당 태종에게 고구려가 입조의 길을 막고 있다고 호소했을 때 태종이 그들의 불평을 들어주지 않은 데는 이렇게 고구려가 미리 당나라를 주물러 놓은 탓도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밀월은 오래 가지 않았다.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무릇 중국의 통일제국이라면 고구려를 정벌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다. 과연 내치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태종은 그 점을 상기시키려는 듯이 먼저 시비를 건다. 631년 고구려의 경관(京觀)을 헐어 버린 것이다. 경관이란 원래 전사자들의 시신을 한데 묻고 추념하는 고구려의 기념물이었으나 당나라가 헐어 버린 것은 수나라 전사자들이 묻힌 곳, 그러니까 고구려의 전승기념비였다. 따라서 단순히 문화유적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었으니 고구려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돌연한 중국의 태도 변화에 영류왕(營留王)은 곧바로 랴오둥에 천리장성을 쌓아 대비한다(당시 랴오둥 일대에는 고구려 성곽들이 많았으므로 그것들을 잇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이 공사는 16년 뒤에 완공된다). 일단 서로 심기가 뒤틀렸겠지만 영류왕은 꾹 눌러참고 태자를 보내 조공했고 당 태종도 환영하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영류왕보다는 태종의 단수가 좀더 높았던 모양이다. 640년에 영류왕은 귀족 집안의 자제들을 당나라의 국자감(國子監, 국립대학)에 유학을 보냈으나국자감은 국학이라고도 부르는데, 수 양제가 처음 설립해서 당나라 초기에 완비되었다. 나중에는 신라에도 도입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존속하면서 대표적인 고등교육기관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성격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수 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했고, 당나라는 과거제를 통한 관리 임용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제국이다. 당시의 학문이라면 단연 유학이었으므로 국자감은 바로 유학 이데올로기를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당 태종은 주변의 모든 나라들에게 국자감에 유학생을 보내라고 지시했는데, 그 의도는 물론 중화 이념의 도구인 유학을 퍼뜨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640년에는 고구려 만이 아니라 백제와 신라도 귀족 자제들을 대거 국자감에 유학을 보냈다, 당 태종은 반대로 진대덕(陳大德)이라는 밀정을 고구려에 파견했다. 경치를 감상하겠다면서 고구려에 온 진대덕은 경치 감상보다 고구려의 지세를 파악하는 데 열심이었고, 고구려 내에 옛 수나라의 종군자들이 남아 있는지 그 현황을 면밀히 조사했다. 귀국한 진대덕에게서 보고를 받은 뒤 당 태종은 고구려는 본디 사군(四郡, 4)의 땅이라며 적절한 구실만 생기면 고구려를 정벌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다. 어차피 찾으면 나오는 게 구실,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결정하는 구실은 고구려에서 제공한다. 때마침 고구려에서 일어난 정변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동북아 네 나리의 입장

신라의 성장통

중국의 낙점

새로운 동맹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

사대주의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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