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육탄 방어
같은 사건을 두고 이해관계에 따라 평가와 대책이 달라지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같은 한반도 땅에서 서로 접경하고 있는 처지에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의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은 중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뜸 수나라의 침략을 걱정했으나 백제의 위덕왕(威德王, 재위 554~598)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즉각 수나라의 천하통일을 치하하는 사신을 보낸 것이다. 나아가 598년에 위덕왕(威德王)은 수 문제가 고구려 정벌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꺼이 길잡이가 되겠다고 나서기까지 한다. 지리적으로 백제가 중국의 고구려 침공에 길잡이를 맡을 수는 없는 데다 그 자신도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였으니 위덕왕은 그냥 제스처를 취해본 데 지나지 않겠지만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고구려에 대해 원한이 사무쳤던 걸까?
아무튼 수나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했으나 위덕왕의 길안내를 받을 마음은 없었고 시기도 아직 일렀다. 수 문제가 분노한 것은 고구려의 이중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평원왕에 이어 즉위한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은 아버지의 숙제였던 수나라의 책봉을 받아내면서 처음에는 매끄럽게 출발했다. 그런데 그 후에도 매년 수나라에 조공하던 영양왕은 갑자기 598년에 랴오시를 침략한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광개토왕(廣開土王) 이래 고구려군이 랴오허를 넘어 서쪽으로 진군한 것은 그게 처음이다. 이에 격노한 수 문제는 영양왕의 관직을 박탈하는데, 이것은 이제부터 고구려를 신하국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태도다.
영양왕은 왜 그랬을까? 혹시 그는 어차피 수나라와 평화로이 지내기는 글렀다고 판단했던 게 아닐까? 일찍이 진과 한이 그랬듯이 중국에 통일제국이 들어선다면 당연히 변방 정리를 최우선 사업으로 삼을 테고, 동북 변방의 고구려는 그 타깃이 될 것이다. 고구려에게 랴오둥을 계속 소유하게 해주지 않는 것은 기본일 테고 아마 고구려를 아예 멸망시키려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직 통일제국이 확고히 자리잡지 못했을 때 선제 공격을 하는 편이 낫다. 영양왕의 생각은 이랬던 게 아닐까? 그러나 영양왕은 그럴 만큼 탁월한 정세분석력과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장마와 전염병에 폭풍까지 만나 병력 수송이 여의치 못하자 그는 곧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수 문제에게 사죄의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위덕왕의 처사를 괘씸히 여겨 백제에 대한 보복 공격으로 방향을 돌렸다.
수 문제는 영양왕(嬰陽王)의 일탈(?)을 용서했으나 그의 아들로 수나라 2대 황제가 된 양제(煬帝, 재위 604~618)의 생각은 달랐다【아버지와 형을 살해할 만큼 잔혹한 인물이긴 해도 양제는 통일제국의 황제답게 스케일이 큰 군주였다. 특히 대외적 안정에만 힘쓴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제국을 제국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래서 벌인 게 대운하 건설이다. 이것은 정치적 중심인 화북의 황허와 경제적 중심인 강남의 양쯔강을 남북으로 잇는 엄청난 규모의 운하인데, 당대의 백성들은 그 대역사 때문에 죽어나야 했고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수 양제는 큰 욕을 얻어 먹어야 했지만 이 운하는 오늘날까지도 잘 사용되고 있으니 지금의 중국인들은 오히려 양제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이집트를 관광대국으로 만든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진 시황제가 남긴 방대한 시황릉,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벌어지던 로마의 콜로세움 등은 모두 당대에는 적지 않은 비난을 받은 건설 사업이지만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지금 인류의 문화유산은 보잘 것 없었을 것이다. 시대를 초월한 역사적 평가란 없는 걸까?】. 먼저 아버지가 시작한 정복사업을 이어받아 북쪽의 돌궐과 서쪽의 토욕혼(Tuyuhun, 吐谷渾)을 물리친 다음 그는 고구려를 2차 작전 대상으로 선포한다(앞서 한 무제에게 쫓겨난 흉노의 경우처럼 돌궐도 둘로 나뉘어 동돌궐은 고구려 북변을 침략했고 서돌궐은 멀리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의 민족이동 도미노를 낳게 된다. 607년 고구려 사신이 있는 자리에서 양제는 고구려 왕이 직접 황궁으로 와서 예를 올리지 않으면 장차 응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물론 제 발로 적지에 들어가 죽을 왕은 없으니 그건 명백한 선전포고다.
그로부터 4년 뒤인 611년 드디어 수 양제는 일정을 확정하고 제국 전체의 군대를 베이징 북쪽의 탁현(涿縣)으로 소집했다. 그가 발표한 출사의 변은 상당히 장황한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고구려는 오랑캐 나라다.
둘째, 오랑캐임에도 중국에 제대로 조공하지 않는다.
셋째, 조공하기는커녕 중국의 달력과 연호도 사용하지 않는다.
넷째, 백제와 신라가 중국에 조공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다섯째, 고구려 백성들은 지배자들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주목할 것은 셋째다. 고구려는 장수왕(長壽王) 때부터 북위에 조공하며 상국의 예우로 대해주었다. 그러나 양제의 말에서 보듯이 고구려는 중국을 섬기면서도 중국의 연호를 쓰지는 않았다. 고대국가에서 연호란 독립국의 상징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북위에 사대하되 속국화되지는 않았고, 북위 역시 고구려의 상국이라고 자처하는 정도에서 더 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분열기에는 이렇게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가능해도 통일기에는 그럴 수 없다.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면 필연적으로 고구려를 정복하고자 하리라는 점은 이것으로도 증명된다.
이듬해인 612년 정월에 출발한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군은 우선 규모에서부터 엄청났다. 전투 병력만 113만 3천 800명에 보급 병력이 그 두 배였으니 아마 크세르크세스 시대(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군 이래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가 아닐까 싶다(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당시 페르시아 다국적군은 528만 3천 220명이라고 하는데, 사실로 믿기는 어렵지만 좌우간 어지간히 많았던 모양이다). 매일 한 부대씩 출발시켰는데 다 보내는 데만도 40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수 양제로서는 총력을 기울일 만도 한 것이, 그에게 고구려는 마지막 정복 대상이었다. 즉위하고 얼마 뒤에 북방의 돌궐과 서역의 토욕혼을 정복했으니 이제 유일한 적은 동북방의 고구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여세를 몰아 고구려마저 제거하고 아직도 불안정한 신생 통일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는 생각이었겠지만, 그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게 있었다. 고구려의 경우는 토욕혼이나 돌궐과 다른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유목 민족이었으므로 적을 당해낼 수 없을 경우에는 살던 곳을 버리고 떠나면 그뿐이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늘 서쪽이 열려 있었으므로 언제든 비단길을 따라 중앙아시아 벌판으로 달아날 수 있었고, 실제로 수나라에 밀려나게 되자 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농경 민족의 피를 가지고 있었으니 삶의 터전에 대한 애착이 심한 데다 달아나고자 해도 달아날 데가 없는 것이다. 한반도 남쪽에는 백제와 신라가 있을 뿐 아니라 설사 그곳으로 도망쳐봤자 곧 바다로 둘러싸인 막다른 골목만 나올 뿐이다. 따라서 어차피 고구려는 백만이 아니라 천만의 병력이 쳐들어온다 해도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또 한 가지, 고구려는 돌궐이나 토욕혼과 달리 일정한 강역과 성곽을 지닌 국가였다(이것 역시 농경문명의 붙박이 성격 때문이다). 중국처럼 국경 주변에 장성을 두르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요처마다 산성을 쌓아 방어했으므로 수비 병력에 비해 훨씬 많은 공격 병력을 상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공격하는 수나라 군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구려의 성들을 모두 깨뜨려야만 앞으로 진군할 수 있었다(당시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은 대중국 수비를 위해 남북으로 포진해 있었는데, 오늘날 만주의 하얼빈 – 창춘 - 쓰핑 – 푸순 – 선양 – 안산 – 다롄의 직선으로 이어지는 도시들은 그 성곽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결국 이 점이 전면전으로는 최초로 맞붙은 중국 고구려 대전의 승부를 갈랐다.
▲ 빛과 그늘 100만이 넘었다는 수나라의 병력은 사실로 믿기 어렵다. 그러나 부풀리기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습관일지도 모르지만 중국이 이긴 전쟁도 아닌데 과장할까 싶기도 하다. 살수대첩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을지문덕은 사진에서처럼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으로뿐 아니라 을지로라는 서울 중심가의 이름으로 남았다. 그러나 또 다른 일등공신인 건무는 잊힌 채 그늘 속의 영웅으로 남았다.
수 양제(煬帝)는 대담하게도 고구려의 주요 성곽인 요동성(지금의 랴오양) 서쪽 부근에 자신이 머물 진을 차렸다. 그의 전략은 본군으로 랴오둥의 고구려 성들을 하나씩 부수는 한편 선박에 병력을 나눠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직접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런 공격측의 전략에 따라 방어하는 고구려도 전선을 둘로 나누었다. 이 두 전선에서 위기의 고구려를 구한 구국의 영웅 두 명이 등장한다.
수나라의 수군 총사령관인 내호아(來護兒)는 거칠 게 없다. 비록 고구려에도 수군이 있다지만 함선들의 길이만도 수백 리나 뻗을 정도의 대군을 감당할 수는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수나라의 수군이 대동강 입구로 들어오는 동안 고구려의 선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순조롭게 대군을 상륙시킨 내호아는 곧바로 평양을 향해 북진하기 시작한다. 그제야 비로소 고구려군의 한 무리가 저항하는데 달걀로 바위치기가 따로 없다. 손쉽게 달걀을 깨버린 뒤 내호아는 내친 김에 후속부대들이 오기 전에 평양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측근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정예군 수만 명을 추려 평양으로 진격했다. 정예군은 도중에 맞부딪친 고구려군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며 평양성 안에 들어섰다. 그러나 너무 싱겁다 싶은 기분이 들 때 그들은 이미 매복에 걸려 있었다. 영양왕의 동생인 건무(建武)가 지휘하는 고구려 정예군은 그들이 약탈에 전념할 때를 기다려 동시에 덮쳤다. 혼비백산한 내호아가 겨우 몸을 추슬러 성 밖으로 나왔을 때 뒤따라 온 병사들은 수천 명으로 줄어 있었다. 고구려군의 거센 추격으로 그들은 불과 얼마 전에 호기롭게 진격하던 길을 거슬러 배가 있는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공교롭게도 이런 양상은 북부 전선, 즉 랴오둥에서도 되풀이된다. 요동성은 수나라 본군의 집요한 공략을 받고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다른 성들도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돌궐과 위구르를 상대할 때처럼 벌판에서 먼지 날리며 한바탕 붙을 생각에 전의를 불태웠던 수나라 지휘관들은 속이 탔지만, 고구려군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수성에 전념하고 있으니 도리가 없다. 결국 그들은 본군을 둘로 나누어 선발대를 고구려 영토 깊숙이 전진시키기로 한다. 선발대의 병력만 해도 무려 30만 5천 명이니 사실 그걸로도 고구려 정복은 충분하다. 문제는 지쳐 버린 병사들이었다. 압록강변에 도착한 뒤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100일분의 식량과 각종 무기에 천막까지 주었으나 병사들은 자기가 먹을 식량조차 짊어질 힘이 없었다. 식량을 버리는 자는 죽이겠다고 을러대자 병사들은 남몰래 식량을 땅에 파묻기까지 했다.
사기는 이미 최저인 상태였으나 워낙 병력의 규모에서 앞선 탓으로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이 이끄는 수나라 군은 압록강을 건너 기세좋게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고구려군 사령관인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미 단신으로 적진 깊숙이 잠입해서 돌아보고 온 터라 적의 약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평양성까지 중간이나 왔을까, 예상했던 대로 수나라 군은 식량이 떨어졌다. 그래도 고구려군은 싸우다 퇴각하기를 반복하며 좀처럼 정면으로 맞붙어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평양성까지는 왔으나 우중문과 우문술은 도저히 성을 함락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때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들에게 묘한 제의를 해온다. 여기서 군대를 돌려준다면 영양왕(嬰陽王)을 모시고 양제가 있는 곳까지 가서 황제를 알현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준다면야 오죽 좋으랴. 심신이 피곤한 탓에 그들은 분별력을 잃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나라 병사들이 등을 보이자 곧바로 고구려군의 화살이 빗발쳤다. 순식간에 전세는 역전되어 수나라 정예군이 싸우다 퇴각하기를 반복하는 식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결국 청천강에 이르러 수나라 병사들은 고구려군에게 덜미가 잡혔다. 절반은 강물에 빠져죽고 절반은 화살에 맞아 죽으니 이것이 우리 역사에 살수대첩이라 알려진 사건이다. 청천강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하루만에 450리를 도망쳐 간신히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그 수는 불과 2천 700명이었다.
▲ 유물을 품은 강 살수대첩의 전적지인 청천강의 모습이다. 1300년 전 수나라 군사들이 퇴각하다가 몰살당했을 정확한 전적지는 알 수 없다. 워낙 많은 병사들이 죽었으니까 이 부근 어딘가를 파보면 아마도 당시의 부장품이 상당수 발굴될 것이다. 이곳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지명들은 대부분 아직까지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시 살수는 보통명사였고 청천강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수나라의 대군은 수륙 양면에서 완벽히 패했다. 그러나 수 양제는 좌절 대신 분노와 복수심을 불태운다. 이듬해인 613년, 그는 측근들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고구려 정벌을 계획했다. 사실 1차전에서 건무와 을지문덕(乙支文德)이 구국의 영웅으로 활약했다지만, 고구려가 승리했다기보다는 수나라가 자멸했다고 봐야 한다.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을 그냥 지나친 것은 하루라도 빨리 고구려의 수도로 진격하겠다는 조급증의 발로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선 요동성부터 확실히 정복하고 천천히 진격하는 작전이 채택된다. 요동성은 랴오둥 방어망의 핵심, 따라서 이곳이 무너지면 랴오둥도 넘어간다. 새로운 전략은 과연 효험이 있었다. 요동성 수비대는 악착같이 버텼으나 워낙 병력의 차이가 큰 탓에 점차 힘에 부친다는 게 명백해졌다. 수나라 군은 성벽보다도 높은 누대를 지어놓고 화살과 돌을 퍼부어댔다. 풍전등화의 위기, 그러나 먼저 국운이 다한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수나라였다.
요동성 함락을 눈앞에 둔 양제에게 본국으로부터 급전이 전해졌다. 평소에도 양제의 전횡에 반대하던 양현감(楊玄感)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지만 죽 쒀서 개 주는 격이라면 밥도 죽도 아니다. 더구나 양현감과 친분이 있는 곡사정(斛斯政)이라는 지휘관이 고구려 측으로 투항하는 사태가 생기자 양제는 할 수 없이 철군을 명령한다.
집요한 양제는 그래도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하고 사태를 추스른 다음 614년에 다시 그는 3차전을 준비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먼 랴오둥 땅에서 헛고생만 한 장수들은 묵묵부답이다. 어쨌든 황명을 받은 내호아가 수군을 거느리고 해안쪽에서 랴오둥을 공략해 들어가는데, 지친 건 양측이 마찬가지다.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는 영양왕은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면서 곡사정을 수나라에 돌려보냈고 역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는 수나라 군은 다시 철수했다. 그러나 영양왕은 직접 입조하라는 양제의 명에는 따를 생각이 없다. 양제는 또 분노해서 4차전을 계획하지만 이제는 그 자신도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3년간의 접전 끝에 종합 전적 1승 1무 1패로 무승부를 기록한 양제와 영양왕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618년)에 죽었는데, 양제는 부하인 우문화급(于文化及)에게 살해당했으니 아마 더 억울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군주들은 죽었지만 그들이 남긴 후유증은 심각했다. 대규모 전란으로 국력이 탕진된 두 나라는 이후 급속한 쇠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고구려 원정에서도 늘 조급함 때문에 일을 그르쳤던 수나라는 명을 재촉하는 데서도 조급했다. 양제가 암살되자 그의 이종사촌인 이연(李淵)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국의 명패를 당(唐)으로 바꾸었다【양제의 성인 양(楊)씨, 그를 살해한 우문(宇文)씨, 그리고 당을 건국한 이(李)씨는 모두 고향이 같으므로 일가붙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전통적인 한족의 성씨가 아니라 남북조시대에 화북을 지배하던 북방 민족의 성씨들이다(아마 선비족의 성씨일 것으로 추측된다). 주목할 것은 나중에 이씨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이성계도 그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지만 그의 조상은 대대로 몽골의 원나라에서 벼슬을 했으므로 북방 혈통일 것으로 추정된다. 성씨 하나로 모든 혈통을 추적할 수는 없지만 혹시 이성계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다면 당나라의 건국 세력, 나아가 남북조시대 선비족에게까지 연결될지도 모른다】. 결국 수나라는 불과 30년도 존속하지 못하고 새 통일 왕조로 교체되었으니 일찍이 진ㆍ한 교체기와 너무도 닮은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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