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통일 시나리오
동북아 네 나라의 입장
반도 북쪽에서 수나라와 고구려가 대회전을 벌이던 무렵 반도 남쪽의 두 나라는 숨죽인 채로 그 승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전쟁에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전쟁의 결과는 곧 그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두 나라는 무엇보다도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생각에 사태를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구려에 적대적이고 중국에 사대하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그들이 응원하는 측은 당연히 수나라다(당시까지는 한반도 단일민족의식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백제와 신라의 입장이 약간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 전쟁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으므로 백제와 신라 역시 팔짱만 끼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수 양제가 마음 속으로 원정 일정을 짜고 있던 607년,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은 그에게 묘한 제의를 해온다. 고구려를 물리쳐달라는 것이다. 하긴, 위덕왕(威德王) 시절 백제는 중국이 고구려를 원정할 경우 길잡이를 맡겠노라고 자청했으니 새로울 건 없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무렵 백제와 신라 사이에 모종의 밀약이 있었던 듯하다는 점이다. 611년에 무왕(武王)은 다시 수 양제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 원정에서 백제가 한몫 거들겠다고 말하는데, 마침 같은 해에 신라의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도 양제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는 요청을 해온다. 사건 약속이 없었다면 하필 같은 시기에 같은 부탁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두 나라의 의도는 좀 달랐던 듯하다. 이듬해 양제가 거병했을 때 무왕은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딴전을 피웠다. 만약 당시 백제가 고구려 남부를 침략했더라면 고구려는 진퇴양난에 빠져 그때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왕은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고구려가 빠진 새로운 동북아 국제질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게 아닐까? 이에 비해 고구려와 백제, 두 강적에 둘러싸여 있는 신라는 그런 향후 전망을 고려할 여유도 없는 처지다. 게다가 고구려는 수나라가 침공해 오기 직전까지도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려 신라를 공격했으니, 진평왕(眞平王)은 무왕과 달리 순수하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랐을 것이다(무왕과 진평왕이 보조를 같이 한 이유는 두 사람의 개인적 관계로도 추측할 수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조금 뒤에 보기로 하자).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동맹이 끊어진 지 오래였으나 이해관계가 같은 탓에 백제와 신라 두 나라의 기묘한 공조체제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중국에 당나라가 들어서자 625년 말에 진평왕이, 몇 개월 뒤에는 무왕이 당나라에게 다시 고구려 정벌을 요청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시나리오까지 똑같다. 즉 두 나라가 중국에 입조하는 길을 고구려가 막고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 전까지 백제와 신라는 뱃길을 통해 중국에 사신을 보내왔으니 그건 명백히 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무왕은 진평왕과 입장 차이를 보인다. 627년 무왕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하류를 수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는데, 진평왕이 당나라에 급히 도움을 호소하자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은 무왕(武王)에게 신라와 서로 싸우지 말고 평화로이 지내라고 타이른다. 일견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태종의 말을 잘 해석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백제와 신라가 중국을 섬기는 태도에 차이가 있음을 간파하고(아마 수-고구려 대전에서 백제가 발을 뺀 전력이 있기 때문일 터이다), 은근히 신라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7세기 초반 중국과 한반도 세 나라의 입장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통일시대에 들어선 중국은 변방 정리의 마무리 작업으로 한반도를 복속시키고자 하며, 그 관건이 고구려 정벌임을 알고 있다. 한편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한반도 남진정책을 추구해 온 데다가 중국이 랴오둥을 노리는 것을 알고부터는 신라에게 잃은 죽령 이북의 땅이 더욱더 절실할 수밖에 없다. 또한 백제는 왕조가 일어난 고향이자 오랜 터전이었던 한강 하류를 신라에게 빼앗겼으므로 역시 고구려와 같이 실지 수복을 노리고 있다. 따라서 신라는 죽령 이북과 한강 하류(쉽게 말해 한반도 중부)를 유지하려면 백제, 고구려와 계속 등질 수밖에 없는 처지이므로 어떻게든 중국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당 태종은 이런 신라의 다급한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당시는 중국과 고구려가 맞선 가운데 백제와 신라가 이해관계에 따라 따로 또 같이 처신하는 복잡미묘한 정세였다. 바로 이런 구도가7세기 후반 삼국통일에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세를 낳은 근본적 원인은 다름아닌 553년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한강 하류 정복이었으니, 결국 진흥왕의 영토 확장은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를 부른 셈이다.
▲ 분쟁의 조정자 당나라의 2대 황제로 제국을 크게 일군 당 태종의 모습이다. 7세기 초반 아마 그는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쿠데타로 갓 잡은 권력을 안정시켜야 했으므로 자기 코가 석 자인 판에 백제 무왕(武王)과 신라 진평왕은 쉴새없이 그에게 고구려를 쳐달라고 부탁하는가 하면, 자기들끼리 다투고서 편들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실은 누구보다 고구려를 없애고 싶은 사람은 그 자신이었으니 당 태종의 심정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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