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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 3부 통일의 바람, 2장 통일 시나리오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종횡무진 한국사 - 3부 통일의 바람, 2장 통일 시나리오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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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통일 시나리오

 

 

동북아 네 나라의 입장

 

 

반도 북쪽에서 수나라와 고구려가 대회전을 벌이던 무렵 반도 남쪽의 두 나라는 숨죽인 채로 그 승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전쟁에 영향을 미칠 수 없지만 전쟁의 결과는 곧 그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두 나라는 무엇보다도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생각에 사태를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구려에 적대적이고 중국에 사대하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그들이 응원하는 측은 당연히 수나라다(당시까지는 한반도 단일민족의식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백제와 신라의 입장이 약간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 전쟁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으므로 백제와 신라 역시 팔짱만 끼고 앉아 있지는 않았다. 수 양제가 마음 속으로 원정 일정을 짜고 있던 607, 백제 무왕(武王, 재위 600~641)은 그에게 묘한 제의를 해온다. 고구려를 물리쳐달라는 것이다. 하긴, 위덕왕(威德王) 시절 백제는 중국이 고구려를 원정할 경우 길잡이를 맡겠노라고 자청했으니 새로울 건 없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무렵 백제와 신라 사이에 모종의 밀약이 있었던 듯하다는 점이다. 611년에 무왕(武王)은 다시 수 양제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 원정에서 백제가 한몫 거들겠다고 말하는데, 마침 같은 해에 신라의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도 양제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는 요청을 해온다. 사건 약속이 없었다면 하필 같은 시기에 같은 부탁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두 나라의 의도는 좀 달랐던 듯하다. 이듬해 양제가 거병했을 때 무왕은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딴전을 피웠다. 만약 당시 백제가 고구려 남부를 침략했더라면 고구려는 진퇴양난에 빠져 그때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왕은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고구려가 빠진 새로운 동북아 국제질서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게 아닐까? 이에 비해 고구려와 백제, 두 강적에 둘러싸여 있는 신라는 그런 향후 전망을 고려할 여유도 없는 처지다. 게다가 고구려는 수나라가 침공해 오기 직전까지도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려 신라를 공격했으니, 진평왕(眞平王)은 무왕과 달리 순수하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랐을 것이다(무왕과 진평왕이 보조를 같이 한 이유는 두 사람의 개인적 관계로도 추측할 수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조금 뒤에 보기로 하자).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동맹이 끊어진 지 오래였으나 이해관계가 같은 탓에 백제와 신라 두 나라의 기묘한 공조체제는 이후에도 계속된다. 중국에 당나라가 들어서자 625년 말에 진평왕이, 몇 개월 뒤에는 무왕이 당나라에게 다시 고구려 정벌을 요청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시나리오까지 똑같다. 즉 두 나라가 중국에 입조하는 길을 고구려가 막고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 전까지 백제와 신라는 뱃길을 통해 중국에 사신을 보내왔으니 그건 명백히 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무왕은 진평왕과 입장 차이를 보인다. 627년 무왕은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하류를 수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는데, 진평왕이 당나라에 급히 도움을 호소하자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은 무왕(武王)에게 신라와 서로 싸우지 말고 평화로이 지내라고 타이른다. 일견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태종의 말을 잘 해석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백제와 신라가 중국을 섬기는 태도에 차이가 있음을 간파하고(아마 수-고구려 대전에서 백제가 발을 뺀 전력이 있기 때문일 터이다), 은근히 신라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7세기 초반 중국과 한반도 세 나라의 입장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통일시대에 들어선 중국은 변방 정리의 마무리 작업으로 한반도를 복속시키고자 하며, 그 관건이 고구려 정벌임을 알고 있다. 한편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한반도 남진정책을 추구해 온 데다가 중국이 랴오둥을 노리는 것을 알고부터는 신라에게 잃은 죽령 이북의 땅이 더욱더 절실할 수밖에 없다. 또한 백제는 왕조가 일어난 고향이자 오랜 터전이었던 한강 하류를 신라에게 빼앗겼으므로 역시 고구려와 같이 실지 수복을 노리고 있다. 따라서 신라는 죽령 이북과 한강 하류(쉽게 말해 한반도 중부)를 유지하려면 백제, 고구려와 계속 등질 수밖에 없는 처지이므로 어떻게든 중국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당 태종은 이런 신라의 다급한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당시는 중국과 고구려가 맞선 가운데 백제와 신라가 이해관계에 따라 따로 또 같이 처신하는 복잡미묘한 정세였다. 바로 이런 구도가7세기 후반 삼국통일에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세를 낳은 근본적 원인은 다름아닌 553년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한강 하류 정복이었으니, 결국 진흥왕의 영토 확장은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를 부른 셈이다.

 

 

분쟁의 조정자 당나라의 2대 황제로 제국을 크게 일군 당 태종의 모습이다. 7세기 초반 아마 그는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쿠데타로 갓 잡은 권력을 안정시켜야 했으므로 자기 코가 석 자인 판에 백제 무왕(武王)과 신라 진평왕은 쉴새없이 그에게 고구려를 쳐달라고 부탁하는가 하면, 자기들끼리 다투고서 편들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실은 누구보다 고구려를 없애고 싶은 사람은 그 자신이었으니 당 태종의 심정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신라의 성장통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신라의 배신으로 깨지고 백제 성왕(聖王)이 전사한 게 불과 50년 전의 일인데도 백제 무왕(武王)이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에 접근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아무리 대고구려 정책에 관한 한 공동의 이해관계로 묶여 있다고는 하지만 백제는 신라와 앙숙인 데다 신라로부터 반드시 되찾아야 할 영토도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무왕은 어떻게 진평왕과 보조를 같이 할 마음을 먹었던 걸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역사에 기록된 무왕의 이름은 장()이지만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다. 서동이라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지는 서동요의 주인공이 아닌가? 백제 왕자 서동이 마 장수로 변장하고 신라에 와서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누어주며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卵乙抱遣去如]’는 음란한(?) 노래를 퍼뜨리게 했다는 게 서동요의 내용이다. 그럼 선화공주는 누굴까? 서동의 이색적인 유혹에 넘어가 나중에 서동을 따라 백제로 가서 왕비가 되는 그녀는 당대 신라의 미인으로 이름높았던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딸이다. 그렇다면 서동은 진평왕의 사위가 되므로 중국에 보내는 서신의 문안까지 충분히 함께 상의할 만한 사이다일부 학자들은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로 미루어 그런 통혼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사건은 두 나라가 밀월관계에 있었던 493동성왕 때의 통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심지어 후대에 조작된 이야기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당시 백제와 신라는 격변하는 동북아 질서 속에서 한편으로는 대립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학자들은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깨어졌다는 사실에 집착하지만, 당시의 동맹은 오늘날의 국제조약과는 달리 조약문서에 조인한 것도 아니고 그다지 엄격한 것도 아니었다. 서동이 무왕(武王)이라는 점에 관해 신채호는 흥미로운 근거를 들고 있다. ‘서동(薯童)’이라는 말은 []를 파는 소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무왕은 후세 사람들이 말통대왕이라 부르기도 했다. 말통은 한자로 未通이라고 쓰지만 이두문이라면 뜻은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말통의 말은 곧 를 뜻하며 통은 의 음역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백제와 신라는 여러 번 전쟁을 벌였으므로 국가 간의 관계까지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무왕(武王)과 진평왕은 가까운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은 백제 왕실만이 아니라 신라 왕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진평왕은 이들을 두지 못하고 딸만 셋을 두었기 때문이다. 내물왕(奈勿王) 이래 신라 왕실에서는 반드시 장자 계승이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왕위계승권을 가진 김씨 남자가 끊기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진평왕이 53년간이나 재위하면서도 아들을 두지 못한 탓에 처음으로 대가 끊기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제 진골(眞骨) 남자는 있어도 성골(聖骨) 남자는 없다(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족일 경우, 진골은 부모 중 한쪽만이 왕족인 경우를 뜻하지만 신라 왕실에서는 족내혼이 행해졌으므로 사실 그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그냥 왕계 혈통에 가까운 정도를 나타내는 구분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 이제 신라 귀족들은 선택해야 한다. 골품이 중요한가, 성별이 중요한가?

 

고민하던 귀족들은 골품을 선택한다. 비록 여성이라 할지라도 성골이 아직 남아 있는 이상 왕위계승권자는 성골이어야 한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래서 진평왕(眞平王)의 맏딸인 덕만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신라는 물론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는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문이 있다. 물론 골품제의 전통은 중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부장제가 당연시되었던 그 시대에 중국에도 전례가 없는 여왕을 옹립하는 일이 쉬웠을까? 고대 일본에는 신화시대에 여성 천황이 있었지만 적어도 역사시대에 동북아시아에서 여성이 국가 수반에 오른 경우는 없었다중국의 경우 여성이 집권한 사례는 있다. 일찍이 한 고조 유방(劉邦)의 아내 여태후는 남편이 죽은 뒤 제국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녀는 실권만 지녔을 뿐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7세기 말에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남편인 태종이 죽자 그의 아들 고종(高宗, 재위 649~683)의 후궁이 되었다가 병약한 고종 대신 권력을 장악했으며, 690년에는 직접 제위에 올라 15년간 재위했다(당나라 때만 해도 유학은 지배 이데올로기였을 뿐 생활의 도덕까지는 못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게 가능했다). 시기로 따지면 신라의 선덕여왕은 측천무후의 선배 격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이 즉위할 무렵 신라 왕실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을 터이다. 게다가 진평왕(眞平王)이 죽었을 때 덕만은 이미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어 있었다. 왕의 딸이면 공주인데 공주가 스님이 되다니? 지금 같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정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법흥왕 때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전해진 이래 진흥왕(眞興王)이 특히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으며, 진평왕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백정(白淨)이라 했고 왕비의 이름까지도 석가 어머니의 이름인 마야 부인이라 불렀다. 이런 집안에서 딸자식 하나 출가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지금도 티베트 같은 곳에서는 자식 하나를 골라 승려로 만드는 풍습이 전해진다).

 

하지만 굳이 절에 가 있는 덕만을 왕궁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뭘까? 사실 귀족들에게는 더 좋은 대안이 있었다. 신라는 원래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평왕(眞平王)에게는 사위가 둘이 있었다(맏딸은 출가했으므로 사위가 둘이다). 물론 둘째 사위는 백제의 무왕(武王)이다. 그럼 첫째 사위는 누굴까? 그는 진평왕 시절에 대장군으로 고구려와 싸워 여러 차례 빛나는 전공을 세웠던 김용춘(金龍春)이다. 왕의 사위였던 만큼 당대에도 유명인사였지만 김용춘은 부하와 아들을 잘 둔 덕에 나중에 더욱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의 부관은 바로 김유신이었고, 그의 아들은 훗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되는 김춘추(金春秋, 602~661)였던 것이다.

 

당연히 김용춘은 왕위계승권을 주장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진평왕의 맏사위이자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의 아들이라는 당당한 신분이었으니 신라 왕위가 그에게 돌아가도 별 하자는 없다. 그가 왕위를 차지하지 못한 이유는 단지 그가 진골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아마 백제 무왕의 상당한 간섭이 있었을 것이다. 무왕도 역시 진평왕(眞平王)의 사위인 데다 일국의 왕이라는 신분이었으니 김용춘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물론 신라의 귀족들이 백제 왕의 왕위계승을 바랐을 리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무왕(武王)에게도 신라 왕위의 계승권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더구나 진평왕과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귀족들은 그 난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에 가 있던 덕만을 불러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치열하게 다투던 김용춘과 무왕이 모종의 합의를 보고 대타를 세우기로 한 걸까?

 

 

여왕의 균형 감각 출가했던 이력이 있는 만큼 선덕여왕은 불교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전대에 완공된 황룡사에 거대한 목탑을 세우도록 한 것도 여왕이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분황사라는 또 하나의 사찰을 건립하게 한 사실이다. 이름의 ()’은 향기라는 뜻인데 사찰 이름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혹시 여왕은 황룡사의 남성적 이미지를 분황사로 중화시켜 균형을 잡으려는 의도를 가졌던 건 아니었을까? 사진은 황룡사 목탑과 대조되는 분황사 석탑이다.

 

 

다행히 여왕을 옹립한 모험은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최초의 여왕답지 않게(?) 선덕여왕은 처음 맡은 나랏일을 능숙히 처리했던 것이다. 일단 여왕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그녀는 백성들에게 1년간 조세를 면제해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봉도 거뜬히 받아냈다. 게다가 백제와 고구려가 침략해 왔을 때도 효과적으로 대처해서 군사적 능력도 뒤지지 않음을 과시했다. 말년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라는 자가 여성 군주를 탓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옥에 티를 남겼으나 그 정도쯤은 탓할 일이 못 된다.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혼란기였던 15년간 그녀가 무사히 나라를 다스리고 나서 또 다시 후계 논란이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여성인 데다 출가했던 몸이었으니 여왕에겐 당연히 후사가 없었다. 덕만을 왕으로 추대할 때 신라의 귀족들이 이런 사태가 올 줄 예상하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이제 무왕(武王)이나 김용춘처럼 왕위를 주장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사실이다(무왕은 641년에 죽었고 김용춘은 기록은 없으나 아들의 나이로 미루어 아마 그 무렵이면 사망했을 것이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 그래서 귀족들은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인 국반의 딸 승만을 다시 여왕으로 모시는데, 그녀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이다.

 

진덕여왕 역시 사촌언니처럼 7년간 나라를 무리없이 잘 이끈다. 그녀에게 후사가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아마 있었다고 해도 왕위계승과는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두 명의 여왕이 다스린 20여 년 동안 후계 문제는 충분히 정리되었다. 이제 성골은 남자든 여자든 완전히 씨가 말랐으니 굳이 여왕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누가 보기에도 격변기의 신라를 맡길 만한 최적임자가 등장했다. 두 여왕의 시대를 평온히 넘길 수 있게 만든 인물, 아니 그보다 두 여왕의 시대에 있었던 대단히 중요한 변화를 주도한 인물, 그는 바로 김춘추였다. 진덕여왕이 죽자 귀족들은 일단 형식적으로 김알천(金閼川)이라는 원로에게 왕위를 맡기려 했으나 분위기를 파악한 김알천은 김춘추를 세상을 구한영웅이라고 추켜세우며 왕위를 양보한다. 이렇게 해서 김춘추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으로 즉위했다.

 

어찌 보면 두 여왕의 치세는 김춘추가 마음껏 활약하도록 해주기 위한 무대와 같았다. 사실 당시 신라에서 여성이 왕위에 오른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일이었으며 고육지책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런 과도기가 없었더라면 국제적으로 중요한 시기를 맞아 신라의 왕권 다툼이 대단히 치열해졌을 것이며, 김춘추라는 인물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도 크게 좁아졌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신라의 성장통이 짧게 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두 여왕이 간접적으로 크게 기여한 덕분이랄까?

 

 

 

 

중국의 낙점

 

 

654년에 김춘추는 왕위에 올랐으나 이미 그때 그의 나이는 쉰이었고, 불과 7년간 재위하고 죽었다. 따라서 그의 즉위는 개인적으로는 아버지 김용춘의 맺힌 한을 풀었다는 것, 공적으로는 그동안 그가 세운 공로에 대한 포상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후 신라의 왕위계승이 매끄러워졌다는 것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처남인 김유신과 더불어 사실상 신라의 리더로서 중대한 시기에 신라의 중대사를 모두 처리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치세에 기록된 거의 모든 일은 그 두 사람의 업적이나 다름없다.

 

수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할 줄 알았던 고구려가 부활하자 한반도 삼국의 관계는 일단 예전으로 돌아갔다. 물론 618년에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가 아직 몸을 추스르기 전이니까 말하자면 폭풍 전야인 셈이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중국 방면에서 폭풍이 밀어닥칠 때가 좋다. 죽령 이북과 한강 하류를 장악하고 있는 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언변이 화려하고 외모도 뛰어나 외교관으로 낙점을 받고 있었던 만큼 김춘추는 국제정세에 밝았다.

 

다시 찾아온 어려운 시기, 신라가 헤쳐나갈 길은 뭘까? 신라 혼자의 힘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두 강적을 상대할 수는 없고, 중국의 당나라는 아직 제 코가 석 자인 신생국이므로 도움을 요청할 시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두 나라 중 우선 어느 한 측만을 적으로 삼아야 한다. 고민하던 김춘추에게 각오를 굳히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642년 여름 백제의 명장 윤충(允忠)은 당시 백제와 신라 접경지대의 요지인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워낙 요충지였으므로 그 자체로도 타격이 컸지만 그보다 더 세게 김춘추의 가슴을 때린 것은 그 전투에서 성의 도독인 김품석(金品釋)과 그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더구나 김품석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백제군에게 항복하러 나갔다가 죽은 것이었다. 아마 김춘추는 김품석의 죽음보다 그의 아내가 죽은 게 더 슬펐을 것이다. 그녀는 바로 김춘추의 딸이었기 때문이다당시 김춘추의 나이가 서른여덟이었으니 그의 사위인 김품석은 아마 새파란 젊은이였을 것이다. 그런 사위를 중요한 대야성의 성주로 임명할 수 있었다면 김춘추의 정치적 입지가 어땠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김품석은 실력자인 장인을 믿고 위세를 떤 소인배였다. 대야성이 함락된 데는 그의 책임이 컸다. 그가 부하인 검일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었다가 이를 눈치챈 검일이 백제군에 투항해서 성의 기밀과 방비 상태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비보를 전해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몸을 기대고 하루종일 망연자실해 있다가 이렇게 부르짖는다. “슬프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리.” 백제의 윤충은 아마도 100년 전 성왕(聖王)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고 여겼겠지만 딸을 잃은 김춘추의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나라 신라는 복수를 해줄 만한 힘이 없다. 사무치는 개인적 원한에다 국가적 과업을 덧붙여 그는 마침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는다. 사적인 복수와 공적인 과제, 어느 것이 그의 마음에서 더 큰 자리를 차지했을까? 추측하자면 아무래도 전자인 듯싶다.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일찍이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영토가 있으니 고구려가 그의 요청을 들어줄 리 없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길로 고구려에 달려간 김춘추는 보장왕(寶藏王, 재위 642~668)에게 백제에 대한 원한과 험담을 늘어놓고 나서 백제 정벌을 부탁했으나 보장왕은 대뜸 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하면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말한다. 그제서야 김춘추는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닫는다. 김춘추가 요구를 거부하자 보장왕은 오히려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리니 김춘추는 대박을 쫓다가 쪽박을 찬 셈이 되어 버렸다. 자칫하면 목숨조차 위험했던 그를 구한 것은 처남인 김유신이다. 선덕여왕의 명을 받아 김유신이 1만의 결사대를 이끌고 북행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보장왕은 김춘추를 돌려보낸다(당시 김춘추는 선도해先道解라는 고구려 관리가 말해준 토끼와 자라의 이야기[龜兎之說]를 듣고 꾀를 써서 풀려났다고 하는데, 거칠부도 고구려 승려를 스승으로 둔 것으로 미루어보면 신라에 우호적인 인물들이 고구려에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첫 외교에서 실패한 김춘추,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건 아니다. 고구려에게서 기대할 게 없으니 이제 고민은 끝났다. 믿을 건 중국의 당나라뿐이다. 마침 그 이듬해 당에 갔다 온 사신의 보고는 그런 희망을 더욱 굳혀준다.

 

같은 시기에 삼국은 한반도 사태를 놓고 모두 당나라에게 지침을 구했다. 중국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현상유지다당시 당 태종 이세민은 초기 권력의 불안정을 딛고 막 안정기로 접어든 상태였으므로 아마 한반도 사태에 직접 개입할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황태자로 책봉되어 있었던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살해하고 626년에 아버지 이연(李淵)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올랐으니, 수 양제를 뺨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양제와 달리 병법과 무술만이 아니라 지도력과 판단력, 아울러 진서(晉書)의 일부마저 직접 집필할 만큼 학문에도 뛰어났다. 그래서 그의 치세 23년간은 중국 역사에서 정관(貞觀, 태종의 연호)의 치()’라 불릴 만큼 번영기였으며, 그와 신하들이 나눈 정치문답은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책으로 꾸며져 후대에 한반도 왕조들이 정치 참고서로 삼을 정도였다. 즉 한반도 삼국은 서로 싸우지 말고 화평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당 태종의 충고는 15년 전 무왕(武王)진평왕(眞平王)고소장을 접수했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그렇다면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신라쪽에 더 후한 점수를 매기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찍이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를 빼앗은 것을 추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대중국 외교의 일선에 나설 차비를 차리고 있던 김춘추는 그런 눈치를 분명히 알아차린 듯하다. 그러나 그 참에 중국의 낙점을 확정지으려던 그는 예상보다 이른 당나라의 행동에 외교 행보를 잠시 늦춘다. 당 태종이 드디어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

 

 

두 김씨 위쪽은 김춘추의 태종무열왕비이고 아래쪽은 김유신이 화랑 시절에 통일의 뜻을 품고 수련했다는 경주 단석산의 석굴이다. 처남-매부 사이인 이 두 김씨는 서로 브레인과 물리력으로 황금 콤비를 이루어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끌어냈다.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의 재위 기간은 오히려 옛 귀족 세력이 무너지고 이들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신 귀족들이 집권하는 좋은 계기로 작용했다.

 

 

새로운 동맹

 

 

백제 무왕(武王)은 아마 당나라와 고구려, 신라를 놓고 한참 저울질을 했던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백제는 그 세 나라와 모두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당나라는 언제든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래야 할 대상이고, 고구려와는 신라에게 영토를 빼앗겼다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으며, 신라와는 진평왕(眞平王)과의 친분이 있다. 그래서 그는 세 나라를 모두 확실한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줄다리기 외교를 펼쳤다. 그런 대치 국면이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훌륭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동북아 정세는 마냥 그렇게 전개될 수 없었다. 특히 태풍의 핵과 같은 당나라가 곧 안정을 찾으면 언제든지 한반도를 복속시키려 들 것이며, 그때 가서는 백제도 어떻게든 분명한 노선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무왕은 안개 정국 속에서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은 달랐다.

 

의자왕 시대에 이르자 비로소 안개가 어느 정도 걷혔다. 어려서부터 영특한 탓에 해동의 증자(曾子, 공자의 제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의자왕의 두뇌는 분주하게 돌아갔다. 우선 진평왕(眞平王)무왕(武王)이 모두 죽었으니 신라와는 이제 아무런 연고도 없다. 게다가 당나라는 한반도 왕조들에게 계속 현상유지를 주문하지만, 그건 신라의 기득권을 보장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백제로서 할 일은 중국이 안정되기 전에 미리 선수를 쳐서 옛날의 한반도 지도를 복원시켜놓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외교를 통해 당나라의 승인을 얻으면 된다. 문제는 고구려인데, 실지 수복에 관한 한 고구려는 동병상련의 처지이므로 최소한 중립화할 수 있거나 아예 동맹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타깃은 신라로 정해진다. 이런 판단에서 의자왕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 공격에 나서서 순식간에 40여 개 성을 획득한다. 그 마무리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앞에 말한 윤충의 대야성 전투였다.

 

그 이듬해 의자왕(義慈王)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드디어 원하던 동맹을 맺는데, 이른바 여제동맹(麗濟同盟)이다. 이런 사정이었으니 김춘추의 고구려 외교가 성공할 리 만무했다. 그런데 고구려가 의자왕이 내미는 손을 굳게 맞잡은 데는 마침 내부 권력 구도가 크게 변한 탓이기도 했다.

 

 

 

 

고구려에서는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낸 영양왕(嬰陽王)618년에 죽자 수나라와의 대회전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더불어 구국의 영웅이었던 건무(建武)가 영류왕(營留王, 재위 618~642)으로 즉위했다. 때마침 자신이 즉위한 그 해에 중국에서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으니 영류왕으로선 신흥제국에 유감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집권 초기에 그는 적극적으로 당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한다. 그 일환으로 당 고조 이연(李淵)의 요청에 따라 만여 명에 달하는 중국 포로들도 송환시켰고, 624년에는 당나라로부터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을 수입하고 도사들을 초빙해 시리즈 특강도 하게 했다도가 사상은 원래 남북조시대에 크게 성행했는데 당나라 초기에는 정부의 특별 지원을 받았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당나라는 수나라에서 명패만 바꾸었을 뿐 그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북 출신의 왕조인 데다 수 나라 황실의 양씨와는 친족 간이었으니 우선 관료와 백성들이 두 나라를 다르게 보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를 느낀 이연(李淵)은 도가의 창시자인 노자(老子)가 이씨였다는 점에 착안해서 노자를 자신의 시조라고 우겼다. 터무니없는 주장이었지만 어쨌든 정부의 대대적인 선전 덕분에 도가는 힘을 얻었고 그 결과 고구려에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무왕(武王)진평왕(眞平王)당 태종에게 고구려가 입조의 길을 막고 있다고 호소했을 때 태종이 그들의 불평을 들어주지 않은 데는 이렇게 고구려가 미리 당나라를 주물러 놓은 탓도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밀월은 오래 가지 않았다.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무릇 중국의 통일제국이라면 고구려를 정벌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다. 과연 내치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태종은 그 점을 상기시키려는 듯이 먼저 시비를 건다. 631년 고구려의 경관(京觀)을 헐어 버린 것이다. 경관이란 원래 전사자들의 시신을 한데 묻고 추념하는 고구려의 기념물이었으나 당나라가 헐어 버린 것은 수나라 전사자들이 묻힌 곳, 그러니까 고구려의 전승기념비였다. 따라서 단순히 문화유적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었으니 고구려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돌연한 중국의 태도 변화에 영류왕(營留王)은 곧바로 랴오둥에 천리장성을 쌓아 대비한다(당시 랴오둥 일대에는 고구려 성곽들이 많았으므로 그것들을 잇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이 공사는 16년 뒤에 완공된다). 일단 서로 심기가 뒤틀렸겠지만 영류왕은 꾹 눌러참고 태자를 보내 조공했고 당 태종도 환영하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영류왕보다는 태종의 단수가 좀더 높았던 모양이다. 640년에 영류왕은 귀족 집안의 자제들을 당나라의 국자감(國子監, 국립대학)에 유학을 보냈으나국자감은 국학이라고도 부르는데, 수 양제가 처음 설립해서 당나라 초기에 완비되었다. 나중에는 신라에도 도입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존속하면서 대표적인 고등교육기관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성격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수 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했고, 당나라는 과거제를 통한 관리 임용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제국이다. 당시의 학문이라면 단연 유학이었으므로 국자감은 바로 유학 이데올로기를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당 태종은 주변의 모든 나라들에게 국자감에 유학생을 보내라고 지시했는데, 그 의도는 물론 중화 이념의 도구인 유학을 퍼뜨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640년에는 고구려 만이 아니라 백제와 신라도 귀족 자제들을 대거 국자감에 유학을 보냈다, 당 태종은 반대로 진대덕(陳大德)이라는 밀정을 고구려에 파견했다. 경치를 감상하겠다면서 고구려에 온 진대덕은 경치 감상보다 고구려의 지세를 파악하는 데 열심이었고, 고구려 내에 옛 수나라의 종군자들이 남아 있는지 그 현황을 면밀히 조사했다. 귀국한 진대덕에게서 보고를 받은 뒤 당 태종은 고구려는 본디 사군(四郡, 4)의 땅이라며 적절한 구실만 생기면 고구려를 정벌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다. 어차피 찾으면 나오는 게 구실,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결정하는 구실은 고구려에서 제공한다. 때마침 고구려에서 일어난 정변이 그 계기가 된 것이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

 

 

두 영웅은 공존하지 못하는 걸까? 콤비를 이루어 나라를 구해냈던 두 영웅인 영류왕(營留王)을지문덕(乙支文德)은 막상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는 화합을 이루지 못했다. 영류왕은 장수왕(長壽王) 이래 고구려 왕실의 전통적인 정책인 남진을 고집했으나, 그에 반해 을지문덕은 중국의 왕조 교체기를 틈타 랴오둥을 다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물론 고구려는 아직 랴오둥의 성곽들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수나라의 침략 이후 랴오둥은 사실상 소유권이 불분명해져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당연히 영류왕에게 줄을 섰다. 아마 무관들은 상당수 을지문덕의 견해에 따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는 패기만만한 한 젊은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바로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이다삼국사기에는 그의 성이 천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연개소문의 성이 당의 건국자인 이연(李淵)의 이름자와 같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중국 황제의 이름자를 피하는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계속된다.

 

호족들의 자치권이 강했던 고구려에서는 원래 아들이 아버지의 관직을 상속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러나 대인(大人, 고구려의 관직)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은 쉽게 그 지위를 물려받지 못했다. 귀족들이 일제히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역사에는 그가 원래 무도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당시 그는 열다섯 살에 불과했으니 아마 귀족들이 반대한 진짜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을지문덕파였던 데 있을 것이다). 일단 연개소문은 귀족들 앞에서 최대한 저자세를 취하며 간신히 지위 상속에 성공했다. 하지만 저자세를 취하는 그의 마음 속에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을 건 틀림없다. 영류왕(營留王)의 천리장성 축조 사업에서 연개소문은 최고 감독자가 되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한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기에는 그의 사적 원한과 공적 야망이 너무 크다. 더구나 귀족들도 그 점을 눈치채고 있다. 어차피 맞부딪힐 일, 연개소문은 먼저 선수를 치기로 결심한다.

 

642년 그는 평양성 남쪽에서 휘하 병력의 열병식을 한다는 구실로 귀족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100명이 넘게 초청을 받았는데 어쩌랴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곧바로 궁중에 들어가 영류왕(營留王)까지도 살해한다. 그리고 왕의 조카를 허수아비 보장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고구려의 전권을 장악하니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쿠데타다.

 

그렇다면 바로 그 시기에 신라의 김춘추가 대야성의 원한을 풀기 위해 고구려로 달려온 것도,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이 동맹의 손길을 뻗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바로 고구려의 신흥 쿠데타 세력과 손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남진을 추구해 온 기존의 세력이 무너지고 중국에 대해 호전적인 정권이 들어섰으니 이제 고구려와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을 품을 수 있다. 김춘추는 혹시 쿠데타 세력이 죽령 이북의 땅을 눈감아주지 않을까 했겠지만 연개소문은 그럴 생각이 없었으므로 의자왕(義慈王)을 파트너로 낙점했던 것이다.

 

 

라오동 벌판 고구려가 전통적으로 랴오둥까지를 국경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랴오허를 따라 늘어선 고구려 성곽들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이 성곽들의 선을 따라 오늘날 만주의 주요 도시들이 발달했다). 수 양제와 달리 당 태종은 랴오둥 벌판의 성곽들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더 이상의 진격이 무모하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은 실제로 옳았다.

 

 

그러나 두 영웅이 공존할 수 없다는 원칙은 달라진 게 없다. 다만 앞서의 두 영웅이 영류왕(營留王)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다면 이번에 자웅을 결할 두 영웅은 연개소문과 당 태종 이세민이다. 쿠데타라는 집권 방식도 닮은꼴이고 나이도 엇비슷한(연개소문의 출생 연도는 전하지 않지만 맡아들인 남생이 634년생인 것으로 미루어 598년생인 이세민보다 약간 아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세민과 연개소문은 점차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맞붙어야 할 호적수로 떠오른다.

 

연개소문의 집권은 그렇잖아도 구실을 찾고 있던 당 태종에게 행동에 나설 계기를 주었다. 중국에 맞서는 고구려, 그리고 그 고구려와 결탁한 백제, 이제 그는 임시 파트너로 여겨왔던 신라에게서 임시라는 딱지를 떼어주고 정식 파트너로 삼는다. 때마침 연개소문이 신라 북변을 침공한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사신을 보내 추궁함으로써 신라를 두둔하고 나섰다. 연개소문은 신라와의 해묵은 숙제가 있음을 주장했고 당나라 사신은 지나간 일을 왜 따지느냐고 말했지만, 서로 간에 그것은 한바탕 붙기 위한 구실일 따름이다. 드디어 당 태종에게는 고구려 원정을 위한 모든 명분이 축적되었다.

 

고구려가 중국의 땅이라는 전통적인 침략의 변이외에 새로 보태어진 명분은 두 가지다.

첫째는 연개소문에 대한 증오다.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나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는 통일제국의 역사적 사명을 정확히 드러내는 명분이다. “사방이 모두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아직 늙지 않았을 때 이를 이루고자 한다.”

 

그러나 군신들의 생각은 황제와 달랐다. 연개소문에 대한 적의나 고구려 정벌의 정당성에서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태종의 원정을 만류했다. “랴오둥은 길이 멀어[원래 랴오, 즉 요라는 땅이름부터가 멀다는 뜻이다] 양곡을 수송하기 어렵고, 고구려는 수성을 잘 하여 정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이 말은 고구려 정벌의 어려움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사실 이세민도 ()을 버리고 말()로 가는 격이라고 말했으니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으로써 역()을 치는 것"이라며 원정을 정당화했으니 애초부터 그에게는 고구려 정벌의 야망이 확고했음을 알 수 있다

 

645년 드디어 유주에 전 병력을 집결시키고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다. 수 양제의 패인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용의주도하게 전쟁을 준비한 덕분일까? 아무튼 스타트는 순조로웠다. 병력은 수나라 때보다 훨씬 적어 17만 정도였지만 어차피 수가 많다고 해서 이기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수나라의 실패에서 배운 바 있다.

 

승패를 좌우하는 관건은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을 어떻게 공략할 것이냐다. 과연 랴오허를 건넌 당나라 본군은 개모성(지금의 푸순)을 함락시켜 초장부터 개가를 올린다. 곧이어 산둥에서 출발한 수군이 랴오둥 반도 끝부분의 비사성(지금의 다롄)을 점령하여 호응한다. 성 하나 제대로 점령하지 못하고 랴오둥 들판을 헤맸던 수나라 때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요처는 수 양제가 집요하게 공략하고서도 끝내 정복하지 못했던 요동성이다. 요동성 앞에 이른 태종은 성을 완전 포위하고 해자를 메우는 작업까지 손수 거들면서 공성에 주력한다. 포차로 돌을 날리고 충차로 부딪기를 수십 일, 드디어 그는 요동성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당시 고구려군은 1만 이상이 전사하고 1만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며, 성 주민 4만과 식량 50만 석이 적의 손으로 넘어갔으니 요동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믿었던 요동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연개소문은 황급히 고혜진(高惠眞)과 고연수(高延壽)에게 전 병력이나 다름없는 15만의 대군을 주어 당나라의 다음 공략지인 안시성을 지원하게 했다. 그러나 두 지휘관은 서로 의견 충돌을 빚은 데다 당 태종이 직접 짠 계략에 넘어가 대패하고 만다.

 

 

이세민이나 연개소문이나 그것으로 고구려의 등불은 꺼졌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꺼진 불도 다시 보게 만든 것은 안시성이었다. 사실 연개소문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 편이 전황에는 더욱 유리했을 것이다. 안시성은 끄떡없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세민이 안시성을 포기하고 그대로 평양을 향해 남진했더라면, 남은 수비 병력이 없는 고구려는 견디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랴오둥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진격했던 수나라의 실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그는 안시성 공략에 나섰고, 안시성은 위기의 고구려를 구했다.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은 이미 당대에 이름을 높이 날리던 명장이었다. 게다가 그는 당대의 명장답지 않게 정치적 야망이 없는 강직하고 충직한 군인이었던 듯하다(연개소문의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랴오둥을 수비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의 북진정책을 추종하지 않았고 따라서 연개소문과 무력 충돌까지 빚은 적이 있었다. 당시 연개소문이 양만춘을 적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그 자신과 고구려의 운명을 위해 더없는 행운이 되었다.

 

요동성의 복제품쯤으로 인식되었던 안시성은 양만춘의 탁월한 솜씨로 오히려 요동성을 능가하는 진품 걸작으로 바뀌어 있었다. 따라서 복제품을 대하는 것과 같은 공략으로는 부술 수 없었다. 안시성 수비군은 적이 포차를 날리면 숨었고 충차를 부딪히면 그 구멍을 메웠다. 심지어 당군은 성벽과 맞먹는 높이의 토산까지 쌓았으나 고구려군은 성벽을 더 높이며 항전했다. 토산이 무너지며 성 한측을 무너뜨리자 번개같이 달려들어 거뜬히 수리했다. 밤낮으로 두 달간을 공략한 끝에 당 태종은 안시성을 부술 수 없음을, 아울러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워낙 애를 먹어 성을 정복하면 성 안의 남자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넣어 죽일 마음까지 품었지만 태종은 분명 당대의 영웅이었다. 양만춘이 성벽에 올라 철수하는 당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태종은 그에게 비단 100필을 보내 적의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랴오둥의 고구려 성 10개를 손에 넣었고 7만의 백성들을 중국으로 이주시켰으니 성과가 적지 않았지만, 전쟁은 중국의 패배였다. 그러나 수 양제도 그랬던 것처럼 당 태종도 고구려 정벌을 1차전으로 끝내려 하지는 않았다. 패전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회복된 646년에도 그는 1차전에서 활약한 이적(李勣, 원래 이름은 세적世勣이었으나 자가 이세민과 같기에 으로 줄였다)에게 고구려 침공을 명했고, 이듬해에는 산둥에서 수군으로 침략하게 했으며, 또 그 이듬해에도 고구려를 공략했다. 하지만 양만춘이 막아준 1차전 이후 정신을 차린 연개소문은 그때마다 뛰어난 전술 운용으로 잘 방어해냈다. 결국 649년 당 태종이 죽음으로써 이 대회전은 막을 내렸다(일설에 의하면 그는 안시성 싸움에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이 멀었고 그 독으로 인해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의 죽음으로 영웅의 시대는 끝났다. 공존할 수 없었던 영웅들 간의 승패를 굳이 따진다면 이세민은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니 패장이 될 터이고 연개소문과 양만춘은 승장이 되겠지만, 나라의 운명은 정반대다. 이세민이 반석 위에 올린 당나라는 강력한 제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다시금 한나라 시대와 같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복원을 노리고 있었고, 연개소문이 사실상 지배한 고구려는 거듭되는 전란으로 국력이 약해지면서 한반도 내에서조차 패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전쟁의 승부를 결정한 전투 안시성 전투의 기록화다. 당군은 랴오둥의 거의 모든 성들을 함락시켰지만 유독 이 안시성만은 무너뜨리지 못했다. 고구려의 야전군이 궤멸한 뒤에도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이 살아남았기에 당 태종은 또 다시 패전의 눈물을 뿌려야 했다. 그러나 안시성은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큰 성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대주의 원년

 

 

예나 지금이나 무장은 좋은 정치인이 되기 어렵다. 연개소문은 개인적 권력욕만이 아니라 국가적 야망도 지닌 인물이었고 당나라의 총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낸 영웅임에는 틀림없으나, 나라의 경영은 군사적 재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나라 이전에 집안의 경영에도 실패했다. 665년 그가 죽자마자 그의 세 아들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서 맏이들 연남생(淵男生, 634~679)은 당나라에 투항해서 고구려 토벌의 앞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건 그의 사후에 일어난 일이니 전적으로 연개소문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의 진정한 잘못은 고구려가 취해야 할 근본적인 노선을 잘못 결정했다는 점이다. 당시 고구려는 대중국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기보다는 당나라와 타협하면서 전통적인 남진정책으로 복귀했어야 했다. 단지 결과론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비록 이세민과 같은 폭력적 쿠데타로 집권한 탓에 특히 이세민의 미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가 적극적인 대중국 외교에 나섰더라면 애초에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그 적극적인 외교가 실은 최대한의 저자세일 수밖에 없다는 게 유감이긴 하지만). 더욱이 중국 귀족들의 의견은 원정 반대였으니 연개소문의 처신에 따라서는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라에게 잃은 영토를 일단 포기하는 아픔이 뒤따라야 했겠지만, 그렇게나마 사직과 국력을 보존했더라면 아마 중국적 질서 아래 고구려는 신라 대신 한반도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나중에 보겠지만 어차피 신라의 삼국통일도 중국적 질서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니까 다를 바 없다).

 

그 점에서 연개소문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 것은 바로 김춘추다.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마자 648년에 그는 직접 중국 외교길에 오른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고구려가 그의 요청을 거절한 직후에 갔어야 했겠지만 당과 고구려 사이의 전쟁으로 6년이나 늦춰진 셈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그의 외교는 절묘한 적시타가 되었으니 아무래도 그에게는 운이 따랐던 모양이다. 좌절과 분노에 가득 찬 당 태종에게 신라의 사신은 상심을 달래줄 애완견이나 다름없었다아닌 게 아니라 바로 몇 개월 전에 온 신라 사신 한질허(邯帙許)에게 당 태종신라는 대조(大朝, )를 섬기면서 왜 연호를 따로 쓰느냐?”고 호통을 친 일이 있다. 더럭 겁이 난 한질허는 법흥왕 때부터 모르고 한 짓인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당장 고치겠다고 했다. 당 태종으로선 고구려에게 뺨 맞고 신라에게 화풀이한 격이지만 어쨌든 그 대답에 기분이 좋았을 법하다. 결국 신라는 그때부터 두 번 다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나중에 보겠지만 고려 초기 잠깐을 제외하고 한반도 왕조들은 항상 중국의 연호를 썼다). 더욱이 사실상 신라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김춘추가 온 것은 그 전까지 국왕이 직접 입조한 경우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당 태종에게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한껏 세울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애완견이 주인에게 먼저 의사 표시를 할 수는 없다. 당의 수도 장안에 간 김춘추는 조급한 마음을 감추고 한동안 국자감을 둘러본다든가 강연을 듣는다든가 하며 짐짓 한가로이 지낸다. 이윽고 주인이 개를 불렀고 그제서야 개는 짖어대기 시작했다. 물론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되니까 고구려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신라는 오래 전부터 천조를 섬겨왔는데, 교활한 백제가 괴롭히고 입조의 길을 막으니 어서 천병(天兵, 당나라 군)을 보내 백제를 멸해주소서.” 주인에게서 그만한 노력을 부탁하려면 아양떠는 것이외에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개는 주인의 모든 것을 따르겠다고 말하며 제 새끼들 중 두 마리를 주인의 곁에 머물게 한다(장남인 김법민金法敏은 왕위계승권자였으므로 신라에 남았고 다른 아들들이 당나라에 남아 관직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648(진덕여왕 2)은 한반도 역사에 길이 남을 사대주의 원년이 되었다. 신라인들은 중국의 의복을 입게 되었고, 100년 동안 써온 독자 연호를 포기하고 중국의 연호와 달력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중국의 군사가 어서 빨리 와서 한반도를 평정해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세 가지 소원중 첫째는 이듬해인 649년에 이루어졌고 (여자의 경우는 664년부터 중국 복식을 입었다), 둘째는 650년 영휘(永徽)라는 중국 연호를 쓰면서 이루어졌으며, 셋째는 당 태종649년에 죽는 바람에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그래서 태종의 연호인 정관대신 고종의 연호인 영휘가 사용된 것이다) 결국에는 이루어졌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김춘추의 외교를 잘못되었다거나 치욕스러운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시 김춘추는 신라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인 방식, 어쩌면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수단을 구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일민족의식이 희박하게나마 존재하던 그 무렵에 한반도 왕조와 백성들에게 중국은 분명한 외세로 인식되고 있었다. 비록 실패한 노선이었지만 연개소문이 대중국 강경 자세를 취한 것은 그 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욱이 신라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깨어진 이래로 백제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늘 패배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당시 신라의 상태가 존망의 위기였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아마 김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고 김품석을 성주로 기용한 자신의 정치적 실수를 해소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던 게 아니었을까??

 

어쨌든 김춘추의 중국 외교로 이제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가닥이 잡혔다. 중국은 고구려 정벌을 원하고 신라는 백제의 정벌을 원한다. 때마침 고구려와 백제는 동맹 체제에 있으니 전선은 뚜렷하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통일, 신라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남부의 통일이 목표다. 이렇게 해서 양측의 통일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시나리오를 무대에 올리는 것뿐이다.

 

 

중국 복장의 신라 사신 당나라 장회태자묘에 그려진 각국 사절단의 그림인데, 오른편에서 두 번째 깃털모자를 쓴 사람이 신라 사신이다. 7세기 후반의 벽화니까 사대주의 원년인 648년 이후의 작품이다. 과연 신라 사신은 모자에 깃털을 꽂은 것만 제외하면 중국 관리들(왼쪽의 세 사람)과 전혀 차이가 없는 복장이다. 바로 옆의 서역 사신이 토착 복식을 한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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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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