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 세계의 중심으로
수ㆍ당 시대는 진 한 시대와 비슷한 출발을 보였으나 성격은 크게 달랐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국가의 성립은 수ㆍ당에 이르러서였다고 할 수 있다. 진ㆍ한 제국은 다분히 봉건적 질서에 의존한 반면, 수ㆍ당 제국은 처음으로 율령(律令)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율령이란 말하자면 오늘날의 헌법에 해당하는데, 수 제국 때 처음 도입되었다가 당 제국 때는 통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았다.
당 고조 이연(李淵)은 수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이연은 수 양제와 이종사촌 간으로 반란 세력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3성 6부와 어사대(감찰 및 사법), 구시(九侍, 제사 주관), 감(監, 황실의 교육 담당) 등 중앙 행정 기구도 기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핵심 관료 기구인 3성의 활동을 보면 당 제국이 이전의 국가들보다 훨씬 발달한 관료제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전문 관료들로 구성된 중서성(中書省)에서 각종 정책과 제도, 황제의 명령 등을 입안해 제출하면 전통의 귀족들로 구성된 문하성(門下省)에서 그것을 심의해 가부를 결정한다. 여기서 통과된 정책은 상서성(尙書省)으로 넘어가 상서성 소속의 6부를 통해 시행에 부친다. 이처럼 통치 행위가 훨씬 전문화되었고, 황제와 귀족층의 합의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었다.
이렇게 전문화되고 방대해진 관료 기구라면 예전처럼 황제의 명령만으로 기능할 수는 없다. 그래서 법이 필요해지는데, 이것이 바로 율령이었다. 고조의 뒤를 이은 당 태종(太宗, 598~649)은 수문제의 개황율령(開皇律令)과 고조의 무덕율령(武德律令)을 참고해 정관율령격식(貞觀律令格式)을 만드는데, 이것으로 당 제국은 최초의 율령 국가로 발돋움한다(율령의 이름들은 모두 해당 황제의 연호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율은 형법이고, 령은 행정법, 격은 율령을 개정할 때 추가되는 법규, 식은 시행세칙에 해당한다.
신생국을 반석에 앉힌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걸출한 군주였다. 그의 재위 시절 23년간은 ‘정관(貞觀)의 치’라고 불리는 번영기였다. 그는 내치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당의 강역을 크게 넓혔다. 우선 아직 잠재적 위협 요소로 남아 있던 북쪽의 돌궐을 마저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탕구트와 고창국을 정복했다. 계속해서 당의 영향력은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 일대, 오늘날의 파키스탄까지 확장되었다. 이 정복 사업의 부산물이 바로 서역 교류다.
일찍이 한 무제 시절 서역에 파견된 장건(張騫)에 의해 중국에 알려진 비단길은 당 제국 때 본격적으로 이용되면서 동서 문화의 교류에 기여한다. 당의 전성기에 수도인 장안에는 색목인(色目人)이라 불리는 서역인들이 무수히 드나들었으며, 귀족들의 집에서는 서역풍의 요리가 크게 유행했다. 당시 장안은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세계 최대의 국제 도시였다. 이처럼 국제 문화에 익숙한 분위기에서 외래 종교인 불교도 크게 진작되어 천태종과 화엄종, 삼론종, 법상종, 정토종, 진언종, 그리고 달마(達磨)의 선종까지 각종 종파가 범람했으며, 이들 종파는 대부분 종단화되어 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당 태종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다. 수 제국 때부터 중국의 숙제로 남아 있던 고구려 정복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정복은커녕 그는 644년의 고구려 원정에서 안시성 주인 양만춘(楊萬春)의 완강한 저항에 가로막혀 물러나고 말았으며, 화살에 맞아 한쪽 눈까지 실명하는 비극을 당했다. 이 원한은 그의 아들 고종(高宗, 재위 649~683)이 푼다. 당 고종은 고구려와 직접 맞붙지 않고 우회 전략으로 전환해 신라와 손을 잡고 동맹국 백제부터 공략했다. 백제를 멸망시킨 뒤 마침내 667년에는 고구려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 한족 왕조의 동북아시아 제패를 끝까지 사수한 최종 수비수였던 고구려는 역사의 지도에서 지워졌다(고구려의 저항을 끝으로 한반도는 이후 1200년간 중국에 사대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고구려가 무너짐으로써 당 제국은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되었으며, 동쪽으로 한반도, 남쪽으로 월남,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북쪽으로 몽골에 이르는 방대한 중화 세계를 구축하고 그 중심이 되었다【일본의 경우는 중국 문화권의 일부로 역사를 출발했으나, 한반도에 친일본 세력인백제가 사라지면서부터는 중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관계로 접어든다. 이때부터 일본은 한동안 중국의 당과 교류를 지속했지만 한반도와 달리 중화 세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살펴보는 일본사에서 그런 점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 당과 조선의 이씨 부자 실제로도 부자간에 이렇게 닮았을지는 모르겠으나, 왼쪽은 당의 건국자 이연(李淵, 고조)이고 오른쪽은 그의 아들인 이세민(태종)이다. 당을 건국한 이씨 부자는 공교롭게도 800년 뒤 한반도에서 조선을 건국한 이씨 부자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두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에게서 왕위를 물려받는 ‘왕자의 난’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연의 둘째 아들인 이세민은 황태자로 책봉된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을 죽이고 아버지에게서 황위를 물려받는다. 이세민과 이방원은 둘 다 골육상잔의 권력투쟁 끝에 건국자가 살아 있는 동안 권력을 강제로 양위받는다는 점에서도 닮은꼴일뿐더러 우연이겠지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마저 같다. 형제를 살해한 당 태종과 조선 태종은 다행히 재위 시절 뛰어난 치적을 보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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