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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안방의 세계 제국: 반복되는 역사(수문제, 수양제, 과거제, 운하)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안방의 세계 제국: 반복되는 역사(수문제, 수양제, 과거제, 운하)

건방진방랑자 2021. 6. 6.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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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안방의 세계 제국

 

 

반복되는 역사

 

중국 역대 왕조는 망할 무렵에 이르면 거의 대부분 외적의 침입이나 농민의 반란과 같은 말기적 증상을 보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권력의 부패와 대토지 겸병 같은 사회적 모순이 수백 년씩 덧쌓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후한이 멸망한 때부터 6세기 말까지 수백 년간의 분열기에는 하나의 왕조가 오래 지배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모순이 쌓일 겨를이 없었다. 그 덕분에 북조의 마지막 나라인 북주의 귀족 양견(楊堅, 541~604)이 새로운 통일 제국 수()를 세우는 과정은 예상외로 순탄하게 진행된다. 그는 먼저 자기 딸을 태자비로 넣어 외척 권력을 손에 쥐고 나서 반대파를 제거한 뒤 제위를 양도받아 581년에 손쉽게 수 제국을 세웠다(516국이나 남북조시대의 여느 나라들처럼 춘추전국시대 유명 제후국들에서 국호를 따오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보면, 혹시 양견은 새로운 통일이라는 점을 한껏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 그리고 589년에는 남조의 마지막 나라인 진()을 함락시켜 마침내 370년 만에 중국 대륙을 재통일했다.

 

그러나 수() 제국은 40년도 채 못 가 당() 제국으로 교체된다. 어쩌면 그렇게 800년 전의 진ㆍ한 교체기와 똑같을까? 오랜 분열기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또한 뒤이은 새 제국들(한과 당)의 예고편 노릇밖에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진시황(秦始皇)의 제국과 양견의 제국은 정확히 닮은꼴이다. 더욱이 비슷한 점은 두 나라 모두 죽 쒀서 남 준 격으로, 짧은 존속 기간 동안에 통일 제국의 터전을 잘 닦아놓고 나서 나라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이다. 진과 수가 크게 고장 난 자동차의 시동을 애써 다시 걸어놓았다면, 한과 당은 그 덕분에 평탄대로를 신나게 달린 셈이 되었다.

 

옛날의 진 제국과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대륙을 통일한 수 제국도 맨땅에서 시작하는 자세로 모든 제도를 재정비하거나 새로 갖추어야 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통일 제국에 어울리는 행정제도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수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 기구를 대대적으로 수술했다. 우선 진ㆍ한 시대의 전통적 중앙 관제인 39경을 36(三省六部)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각 부서의 이름만 약간씩 바뀌면서 당 제국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또 수백 년 동안 여러 나라가 난립하다 보니 각 지방에는 행정 관청만 잔뜩 늘어났다. 신생국은 늘 작은 정부를 주창하게 마련이다. 수 문제는 공무원을 감축하기 위해 한 제국의 군현제(郡縣制)부터 유지되어오던 주(), (), ()의 지방 행정제도에서 군을 없애고 주와 현만 남겨놓았다. 또 지방 수령이 가지고 있던 관리 임명권과 병권을 중앙 정부로 회수했다. 이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통일 제국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절반은 달성했다.

 

 

 

수 문제 오랜 분열기를 끝내고 진시황 이래 두 번째로 중국 대륙을 재통일한 수 문제 양견의 모습이다. 그러나 수 제국은 400년 만에 이룬 천하통일을 불과 40년 만에 당 제국에 내주면서 진시황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

 

 

관료제를 완성하려면 관리 임용 제도를 완비해야 한다. 종래의 임용 제도인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는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원래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위나라가 도입한 9품 중정제는 그 핵심인 중정이 부패한 인물일 경우에는 오히려 해가 많은 제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남북조시대에 귀족 세력은 9품 중정제를 악용해 세력을 키우고 관직을 기의 독점한 터였다. 귀족의 그런 전횡을 막으면서 더 합리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관리 임용 제도는 없는 걸까? 고민 끝에 절묘한 답이 나왔다. 바로 과거제였다.

 

관리 후보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해서 고득점자를 관리로 선발하면 된다. 귀족의 자의적인 관리 임용을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험 점수는 객관적이므로 누구도 합리성을 의심할 수 없다. 당대에는 관리 임용 제도로서의 의미가 컸지만, 과거제는 이후 필답고사로 필요한 인력을 선발하는 동양 특유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의 대학입시, 각종 고시, 입사 시험과 승진 시험 등 시험과 관련된 모든 제도는 과거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과거제가 과연 겉으로 표방한 취지만큼 합리적인 제도인지는 이미 출범 당시에도, 또 이후에도 의문시되었다).

 

587년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과거제(科擧制)는 다른 제도들처럼 후속 왕조인 당 제국 시절에 꽃을 피웠으며, 이후 20세기 초 청 제국 말기까지 1500년 동안이나 중국의 기본적인 관리 임용 제도가 된다관리 임용 제도는 대개 왕권 강화를 위해 실시되는 게 보통이다. 중국에서처럼 한반도에서도 그랬다. 우리 역사에서 9품 중정제와 비슷한 것으로는 788년에 신라의 원성왕이 시행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있다. 또 과거제는 958년 고려의 광종이 중국의 예를 좇아 처음 도입했다. 재미있는 것은, 신라의 원성왕과 고려의 광종 모두 왕권 강화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는 점이 신라의 원성왕은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광종은 고려 초 치열한 왕자의 난을 치르고 즉위했다. 이와 같은 수의 관제와 과거제 이외에 남북조시대의 균전제(均田制)부병제(府兵制) 등도 모두 당 제국에 그대로 이어졌다.

 

 

과거 시험장 수 문제가 처음으로 실시한 과거제(科擧制)는 이후 중국 역대 왕조의 관리 임용 제도가 되었다(한반도에서도 고려 초에 광종이 처음 도입했다). 그림은 과거제가 가장 활성화되었던 송대의 과거 시험장의 광경이다.

 

 

과거의 진 제국을 연상시키는 또 한 가지 닮은꼴은 대운하의 건설이다. 진이 만리장성을 쌓았다면, 수는 대운하를 건설했다. 건국자인 문제의 뒤를 이은 수 양제(煬帝)는 옛날의 진시황(秦始皇)처럼 여러 가지 대형 토목 사업을 일으켰는데, 그 가운데 진의 만리장성에 해당하는 업적이 대운하였다. 중국 지도를 보면 서쪽에서 동쪽의 황해로 흘러드는 세 개의 큰 강이 있다. 북쪽에서부터 말하면 황허(黃海), 화이허(淮河), 양쯔강(揚子江)의 세 강이다. 이 강들은 모두 큰 강이므로 상류에서 하류까지 선박을 이용한 운송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남북 방향의 운송로가 없다는 점이다. 이 단점을 해소하려 한 것이 바로 대운하였다.

 

남조와 북조로 분립하던 시대가 끝나고 통일 제국이 들어섰으니, 수 양제로서는 강남과 화북을 잇는 교통로가 절실하게 필요했을 것이다. 610년에 완공된 대운하 덕분에 항저우에서 베이징(北京)까지 선박 운송이 가능해졌으며, 쌀을 비롯한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화북으로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남북조시대에 각개 발전을 통해 성장해왔던 강남과 강북이 이제 대운하로 이어졌으니 명실상부한 통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사에 길이 남는 위업은 대개 백성들의 고통을 바탕으로 하므로 당대에는 욕을 많이 얻어먹게 마련이다. 오늘날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과 여산릉 등은 당대의 무수한 인명을 희생하고 재원을 탕진한 결과로 완성되었다. 물론 당대에는 문화유산으로 기획된 게 아니라 현실적인 용도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대운하는 물자 유통을 편리하게 하는 시설이었기 때문에 다른 문화유산에 비해 훨씬 실용도가 높았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그 이익이 실현된 것은 당 제국 때였다는 점이다. 수 제국은 대운하 건설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특히 양제는 개인적으로도 비운을 맞았다.

 

 

 

 

오랜만의 통일로 중국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수 양제에게는 골칫거리가 있었다. 바로 중국의 분열기에 힘을 쌓고, 강성해진 북방의 오랑캐였다. 중원의 북방에는 한 무제 이래 오랜 토벌과 동화 정책으로 흉노가 사라진 대신 돌궐(突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건국자 수 문제는 탁월한 이간책을 구사해 돌궐을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시켜 세력을 약화시킨 바 있었다흉노의 경우도 그랬듯이, 수 제국이 돌궐을 압박한 것은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대규모 민족이동을 낳았다. 서돌궐은 옛 흉노처럼 비단길을 거쳐 중앙아시아로 가서 그곳의 작은 나라들을 짓밟았다. 게다가 명칭도 돌궐에서 음차되어 튀르크(Türk: 오늘날 터키의 어원)로 바뀌었다. 계속해서 튀르크는 서아시아의 이슬람권과 융화되어 족장의 이름에 따라 셀주크, 오스만 같은 명칭을 달게 되었다. 14세기부터 강성해진 오스만튀르크는 1453년에 서쪽 동유럽의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을 정복했다. 1000년 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과정과 비슷하다. 결국 한족 제국(한과 수)의 압박 정책, 한 무제와 수 문제의 북변 정리는 수백 년 뒤 멀리 두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는 도미노 효과를 낳은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누구도 기획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지만 역사에는 이처럼 어떤 행위가 무의식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돌궐보다 조금 더 변방에는 그들보다 더 막강한 상대가 있었다. 한반도의 대표 주자인 고구려다.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시대가 한창이던 4세기 초반부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수가 통일하는 6세기 말에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호령하는 강국이 되었다(한반도의 고대 삼국이 크게 발전한 것은 당시 중국이 분열기에 있었던 덕분이 크다). 수 문제는 한 차례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한 뒤 포기했지만, 야심만만한 양제는 고구려를 복속시켜 명실상부한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마음 먹는다.

 

그 불타는 야심에 기름을 끼얹어준 게 바로 대운하였다. 지금까지 고구려 정벌을 어렵게 하는 최대의 문제점은 보급로였는데, 이제 대운하가 해결해주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마침내 양제는 611년 전투군 113만 명에 함선 300척의 어마어마한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나섰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고대사상 최대의 국제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보급로만 해결하면 될 줄 알았던 양제의 의도와는 달리 수군은 고구려의 뛰어난 유격전술(그중 유명한 것이 을지문덕살수대첩이다)에 말려 참패하고 만다.

 

복수심에 불탄 양제는 이후에도 재차 3차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지만, 대규모 토목 사업에다 전쟁 준비로 민심이 등을 돌리고 각지에서 무수한 반란들이 일어나면서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었으면 좋겠는데, 양제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부하의 손에 피살되고 만 것이다. 결국 그의 업적인 대운하는 신생제국 수의 명운과 아울러 그 자신의 목숨까지 재촉하는 결과를 빚었다.

 

진시황(秦始皇)과 수 양제, 만리장성과 대운하, 의도하지 않게 엄청난 역사적 결과를 낳은 북변 정리. 이렇듯 역사는 가혹하게 되풀이된다. 진 한 교체기와의 마지막 닮은꼴은 곧이어 새 제국이 들어섰다는 점이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혼란스런 와중에 변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수의 장수 이연(李淵, 566~635)은 드디어 거사에 나서 수의 도읍인 장안을 점령하고 당 제국을 세웠다.

 

 

강국 고구려 후한의 몰락 이후 중국 대륙의 오랜 분열기를 틈타 한반도에도 강력한 고대국가가 생겨났다. 그림은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로, 4세기경 낙랑을 몰아내고 한반도의 패자가 된 고구려인의 기상을 잘 보여준다. 중국의 통일 제국 수와 당은 명실상부한 동북아시아 천하통일을 이루기 전에 고구려의 호된 시험을 치러야 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반복되는 역사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

쓰러지는 세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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