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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중국의 낙점(태종무열왕, 윤충, 보장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중국의 낙점(태종무열왕, 윤충, 보장왕)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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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낙점

 

 

654년에 김춘추는 왕위에 올랐으나 이미 그때 그의 나이는 쉰이었고, 불과 7년간 재위하고 죽었다. 따라서 그의 즉위는 개인적으로는 아버지 김용춘의 맺힌 한을 풀었다는 것, 공적으로는 그동안 그가 세운 공로에 대한 포상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후 신라의 왕위계승이 매끄러워졌다는 것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처남인 김유신과 더불어 사실상 신라의 리더로서 중대한 시기에 신라의 중대사를 모두 처리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치세에 기록된 거의 모든 일은 그 두 사람의 업적이나 다름없다.

 

수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할 줄 알았던 고구려가 부활하자 한반도 삼국의 관계는 일단 예전으로 돌아갔다. 물론 618년에 수나라를 대체한 당나라가 아직 몸을 추스르기 전이니까 말하자면 폭풍 전야인 셈이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중국 방면에서 폭풍이 밀어닥칠 때가 좋다. 죽령 이북과 한강 하류를 장악하고 있는 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언변이 화려하고 외모도 뛰어나 외교관으로 낙점을 받고 있었던 만큼 김춘추는 국제정세에 밝았다.

 

다시 찾아온 어려운 시기, 신라가 헤쳐나갈 길은 뭘까? 신라 혼자의 힘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두 강적을 상대할 수는 없고, 중국의 당나라는 아직 제 코가 석 자인 신생국이므로 도움을 요청할 시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두 나라 중 우선 어느 한 측만을 적으로 삼아야 한다. 고민하던 김춘추에게 각오를 굳히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642년 여름 백제의 명장 윤충(允忠)은 당시 백제와 신라 접경지대의 요지인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워낙 요충지였으므로 그 자체로도 타격이 컸지만 그보다 더 세게 김춘추의 가슴을 때린 것은 그 전투에서 성의 도독인 김품석(金品釋)과 그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더구나 김품석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백제군에게 항복하러 나갔다가 죽은 것이었다. 아마 김춘추는 김품석의 죽음보다 그의 아내가 죽은 게 더 슬펐을 것이다. 그녀는 바로 김춘추의 딸이었기 때문이다당시 김춘추의 나이가 서른여덟이었으니 그의 사위인 김품석은 아마 새파란 젊은이였을 것이다. 그런 사위를 중요한 대야성의 성주로 임명할 수 있었다면 김춘추의 정치적 입지가 어땠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김품석은 실력자인 장인을 믿고 위세를 떤 소인배였다. 대야성이 함락된 데는 그의 책임이 컸다. 그가 부하인 검일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었다가 이를 눈치챈 검일이 백제군에 투항해서 성의 기밀과 방비 상태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비보를 전해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몸을 기대고 하루종일 망연자실해 있다가 이렇게 부르짖는다. “슬프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리.” 백제의 윤충은 아마도 100년 전 성왕(聖王)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했다고 여겼겠지만 딸을 잃은 김춘추의 마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나라 신라는 복수를 해줄 만한 힘이 없다. 사무치는 개인적 원한에다 국가적 과업을 덧붙여 그는 마침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는다. 사적인 복수와 공적인 과제, 어느 것이 그의 마음에서 더 큰 자리를 차지했을까? 추측하자면 아무래도 전자인 듯싶다. 냉정하게 판단했다면 일찍이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영토가 있으니 고구려가 그의 요청을 들어줄 리 없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길로 고구려에 달려간 김춘추는 보장왕(寶藏王, 재위 642~668)에게 백제에 대한 원한과 험담을 늘어놓고 나서 백제 정벌을 부탁했으나 보장왕은 대뜸 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하면 부탁을 들어주겠노라고 말한다. 그제서야 김춘추는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닫는다. 김춘추가 요구를 거부하자 보장왕은 오히려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리니 김춘추는 대박을 쫓다가 쪽박을 찬 셈이 되어 버렸다. 자칫하면 목숨조차 위험했던 그를 구한 것은 처남인 김유신이다. 선덕여왕의 명을 받아 김유신이 1만의 결사대를 이끌고 북행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보장왕은 김춘추를 돌려보낸다(당시 김춘추는 선도해先道解라는 고구려 관리가 말해준 토끼와 자라의 이야기[龜兎之說]를 듣고 꾀를 써서 풀려났다고 하는데, 거칠부도 고구려 승려를 스승으로 둔 것으로 미루어보면 신라에 우호적인 인물들이 고구려에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첫 외교에서 실패한 김춘추,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없었던 건 아니다. 고구려에게서 기대할 게 없으니 이제 고민은 끝났다. 믿을 건 중국의 당나라뿐이다. 마침 그 이듬해 당에 갔다 온 사신의 보고는 그런 희망을 더욱 굳혀준다.

 

같은 시기에 삼국은 한반도 사태를 놓고 모두 당나라에게 지침을 구했다. 중국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현상유지다당시 당 태종 이세민은 초기 권력의 불안정을 딛고 막 안정기로 접어든 상태였으므로 아마 한반도 사태에 직접 개입할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황태자로 책봉되어 있었던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살해하고 626년에 아버지 이연(李淵)의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올랐으니, 수 양제를 뺨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양제와 달리 병법과 무술만이 아니라 지도력과 판단력, 아울러 진서(晉書)의 일부마저 직접 집필할 만큼 학문에도 뛰어났다. 그래서 그의 치세 23년간은 중국 역사에서 정관(貞觀, 태종의 연호)의 치()’라 불릴 만큼 번영기였으며, 그와 신하들이 나눈 정치문답은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책으로 꾸며져 후대에 한반도 왕조들이 정치 참고서로 삼을 정도였다. 즉 한반도 삼국은 서로 싸우지 말고 화평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당 태종의 충고는 15년 전 무왕(武王)진평왕(眞平王)고소장을 접수했을 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

 

그렇다면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신라쪽에 더 후한 점수를 매기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찍이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영토를 빼앗은 것을 추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대중국 외교의 일선에 나설 차비를 차리고 있던 김춘추는 그런 눈치를 분명히 알아차린 듯하다. 그러나 그 참에 중국의 낙점을 확정지으려던 그는 예상보다 이른 당나라의 행동에 외교 행보를 잠시 늦춘다. 당 태종이 드디어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

 

 

두 김씨 위쪽은 김춘추의 태종무열왕비이고 아래쪽은 김유신이 화랑 시절에 통일의 뜻을 품고 수련했다는 경주 단석산의 석굴이다. 처남-매부 사이인 이 두 김씨는 서로 브레인과 물리력으로 황금 콤비를 이루어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끌어냈다.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의 재위 기간은 오히려 옛 귀족 세력이 무너지고 이들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신 귀족들이 집권하는 좋은 계기로 작용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동북아 네 나리의 입장

신라의 성장통

중국의 낙점

새로운 동맹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

사대주의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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