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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신라의 성장통(서동,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3부 통일의 바람 - 2장 통일 시나리오, 신라의 성장통(서동,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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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성장통

 

 

나제동맹(羅濟同盟)이 신라의 배신으로 깨지고 백제 성왕(聖王)이 전사한 게 불과 50년 전의 일인데도 백제 무왕(武王)이 신라의 진평왕(眞平王)에 접근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아무리 대고구려 정책에 관한 한 공동의 이해관계로 묶여 있다고는 하지만 백제는 신라와 앙숙인 데다 신라로부터 반드시 되찾아야 할 영토도 있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무왕은 어떻게 진평왕과 보조를 같이 할 마음을 먹었던 걸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역사에 기록된 무왕의 이름은 장()이지만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다. 서동이라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지는 서동요의 주인공이 아닌가? 백제 왕자 서동이 마 장수로 변장하고 신라에 와서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누어주며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卵乙抱遣去如]’는 음란한(?) 노래를 퍼뜨리게 했다는 게 서동요의 내용이다. 그럼 선화공주는 누굴까? 서동의 이색적인 유혹에 넘어가 나중에 서동을 따라 백제로 가서 왕비가 되는 그녀는 당대 신라의 미인으로 이름높았던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딸이다. 그렇다면 서동은 진평왕의 사위가 되므로 중국에 보내는 서신의 문안까지 충분히 함께 상의할 만한 사이다일부 학자들은 당시 백제와 신라의 관계로 미루어 그런 통혼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사건은 두 나라가 밀월관계에 있었던 493동성왕 때의 통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심지어 후대에 조작된 이야기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당시 백제와 신라는 격변하는 동북아 질서 속에서 한편으로는 대립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학자들은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깨어졌다는 사실에 집착하지만, 당시의 동맹은 오늘날의 국제조약과는 달리 조약문서에 조인한 것도 아니고 그다지 엄격한 것도 아니었다. 서동이 무왕(武王)이라는 점에 관해 신채호는 흥미로운 근거를 들고 있다. ‘서동(薯童)’이라는 말은 []를 파는 소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무왕은 후세 사람들이 말통대왕이라 부르기도 했다. 말통은 한자로 未通이라고 쓰지만 이두문이라면 뜻은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말통의 말은 곧 를 뜻하며 통은 의 음역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백제와 신라는 여러 번 전쟁을 벌였으므로 국가 간의 관계까지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무왕(武王)과 진평왕은 가까운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은 백제 왕실만이 아니라 신라 왕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진평왕은 이들을 두지 못하고 딸만 셋을 두었기 때문이다. 내물왕(奈勿王) 이래 신라 왕실에서는 반드시 장자 계승이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왕위계승권을 가진 김씨 남자가 끊기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진평왕이 53년간이나 재위하면서도 아들을 두지 못한 탓에 처음으로 대가 끊기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제 진골(眞骨) 남자는 있어도 성골(聖骨) 남자는 없다(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족일 경우, 진골은 부모 중 한쪽만이 왕족인 경우를 뜻하지만 신라 왕실에서는 족내혼이 행해졌으므로 사실 그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그냥 왕계 혈통에 가까운 정도를 나타내는 구분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 이제 신라 귀족들은 선택해야 한다. 골품이 중요한가, 성별이 중요한가?

 

고민하던 귀족들은 골품을 선택한다. 비록 여성이라 할지라도 성골이 아직 남아 있는 이상 왕위계승권자는 성골이어야 한다고 결론지은 것이다. 그래서 진평왕(眞平王)의 맏딸인 덕만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신라는 물론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는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의문이 있다. 물론 골품제의 전통은 중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부장제가 당연시되었던 그 시대에 중국에도 전례가 없는 여왕을 옹립하는 일이 쉬웠을까? 고대 일본에는 신화시대에 여성 천황이 있었지만 적어도 역사시대에 동북아시아에서 여성이 국가 수반에 오른 경우는 없었다중국의 경우 여성이 집권한 사례는 있다. 일찍이 한 고조 유방(劉邦)의 아내 여태후는 남편이 죽은 뒤 제국의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녀는 실권만 지녔을 뿐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7세기 말에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남편인 태종이 죽자 그의 아들 고종(高宗, 재위 649~683)의 후궁이 되었다가 병약한 고종 대신 권력을 장악했으며, 690년에는 직접 제위에 올라 15년간 재위했다(당나라 때만 해도 유학은 지배 이데올로기였을 뿐 생활의 도덕까지는 못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아내로 삼는 게 가능했다). 시기로 따지면 신라의 선덕여왕은 측천무후의 선배 격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이 즉위할 무렵 신라 왕실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을 터이다. 게다가 진평왕(眞平王)이 죽었을 때 덕만은 이미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어 있었다. 왕의 딸이면 공주인데 공주가 스님이 되다니? 지금 같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정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법흥왕 때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로 불교가 전해진 이래 진흥왕(眞興王)이 특히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으며, 진평왕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백정(白淨)이라 했고 왕비의 이름까지도 석가 어머니의 이름인 마야 부인이라 불렀다. 이런 집안에서 딸자식 하나 출가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지금도 티베트 같은 곳에서는 자식 하나를 골라 승려로 만드는 풍습이 전해진다).

 

하지만 굳이 절에 가 있는 덕만을 왕궁으로 불러들인 이유는 뭘까? 사실 귀족들에게는 더 좋은 대안이 있었다. 신라는 원래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평왕(眞平王)에게는 사위가 둘이 있었다(맏딸은 출가했으므로 사위가 둘이다). 물론 둘째 사위는 백제의 무왕(武王)이다. 그럼 첫째 사위는 누굴까? 그는 진평왕 시절에 대장군으로 고구려와 싸워 여러 차례 빛나는 전공을 세웠던 김용춘(金龍春)이다. 왕의 사위였던 만큼 당대에도 유명인사였지만 김용춘은 부하와 아들을 잘 둔 덕에 나중에 더욱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의 부관은 바로 김유신이었고, 그의 아들은 훗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되는 김춘추(金春秋, 602~661)였던 것이다.

 

당연히 김용춘은 왕위계승권을 주장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진평왕의 맏사위이자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의 아들이라는 당당한 신분이었으니 신라 왕위가 그에게 돌아가도 별 하자는 없다. 그가 왕위를 차지하지 못한 이유는 단지 그가 진골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아마 백제 무왕의 상당한 간섭이 있었을 것이다. 무왕도 역시 진평왕(眞平王)의 사위인 데다 일국의 왕이라는 신분이었으니 김용춘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물론 신라의 귀족들이 백제 왕의 왕위계승을 바랐을 리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무왕(武王)에게도 신라 왕위의 계승권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더구나 진평왕과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귀족들은 그 난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에 가 있던 덕만을 불러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치열하게 다투던 김용춘과 무왕이 모종의 합의를 보고 대타를 세우기로 한 걸까?

 

 

여왕의 균형 감각 출가했던 이력이 있는 만큼 선덕여왕은 불교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전대에 완공된 황룡사에 거대한 목탑을 세우도록 한 것도 여왕이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분황사라는 또 하나의 사찰을 건립하게 한 사실이다. 이름의 ()’은 향기라는 뜻인데 사찰 이름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혹시 여왕은 황룡사의 남성적 이미지를 분황사로 중화시켜 균형을 잡으려는 의도를 가졌던 건 아니었을까? 사진은 황룡사 목탑과 대조되는 분황사 석탑이다.

 

 

다행히 여왕을 옹립한 모험은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최초의 여왕답지 않게(?) 선덕여왕은 처음 맡은 나랏일을 능숙히 처리했던 것이다. 일단 여왕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그녀는 백성들에게 1년간 조세를 면제해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봉도 거뜬히 받아냈다. 게다가 백제와 고구려가 침략해 왔을 때도 효과적으로 대처해서 군사적 능력도 뒤지지 않음을 과시했다. 말년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라는 자가 여성 군주를 탓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옥에 티를 남겼으나 그 정도쯤은 탓할 일이 못 된다.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혼란기였던 15년간 그녀가 무사히 나라를 다스리고 나서 또 다시 후계 논란이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여성인 데다 출가했던 몸이었으니 여왕에겐 당연히 후사가 없었다. 덕만을 왕으로 추대할 때 신라의 귀족들이 이런 사태가 올 줄 예상하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이제 무왕(武王)이나 김용춘처럼 왕위를 주장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사실이다(무왕은 641년에 죽었고 김용춘은 기록은 없으나 아들의 나이로 미루어 아마 그 무렵이면 사망했을 것이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 그래서 귀족들은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인 국반의 딸 승만을 다시 여왕으로 모시는데, 그녀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이다.

 

진덕여왕 역시 사촌언니처럼 7년간 나라를 무리없이 잘 이끈다. 그녀에게 후사가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아마 있었다고 해도 왕위계승과는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두 명의 여왕이 다스린 20여 년 동안 후계 문제는 충분히 정리되었다. 이제 성골은 남자든 여자든 완전히 씨가 말랐으니 굳이 여왕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누가 보기에도 격변기의 신라를 맡길 만한 최적임자가 등장했다. 두 여왕의 시대를 평온히 넘길 수 있게 만든 인물, 아니 그보다 두 여왕의 시대에 있었던 대단히 중요한 변화를 주도한 인물, 그는 바로 김춘추였다. 진덕여왕이 죽자 귀족들은 일단 형식적으로 김알천(金閼川)이라는 원로에게 왕위를 맡기려 했으나 분위기를 파악한 김알천은 김춘추를 세상을 구한영웅이라고 추켜세우며 왕위를 양보한다. 이렇게 해서 김춘추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으로 즉위했다.

 

어찌 보면 두 여왕의 치세는 김춘추가 마음껏 활약하도록 해주기 위한 무대와 같았다. 사실 당시 신라에서 여성이 왕위에 오른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일이었으며 고육지책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런 과도기가 없었더라면 국제적으로 중요한 시기를 맞아 신라의 왕권 다툼이 대단히 치열해졌을 것이며, 김춘추라는 인물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도 크게 좁아졌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신라의 성장통이 짧게 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두 여왕이 간접적으로 크게 기여한 덕분이랄까?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동북아 네 나리의 입장

신라의 성장통

중국의 낙점

새로운 동맹

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

사대주의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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