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할 수 없는 두 영웅③
이세민이나 연개소문이나 그것으로 고구려의 등불은 꺼졌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꺼진 불도 다시 보게 만든 것은 안시성이었다. 사실 연개소문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 편이 전황에는 더욱 유리했을 것이다. 안시성은 끄떡없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세민이 안시성을 포기하고 그대로 평양을 향해 남진했더라면, 남은 수비 병력이 없는 고구려는 견디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랴오둥을 포기하고 평양으로 진격했던 수나라의 실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그는 안시성 공략에 나섰고, 안시성은 위기의 고구려를 구했다.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은 이미 당대에 이름을 높이 날리던 명장이었다. 게다가 그는 당대의 명장답지 않게 정치적 야망이 없는 강직하고 충직한 군인이었던 듯하다(연개소문의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랴오둥을 수비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의 북진정책을 추종하지 않았고 따라서 연개소문과 무력 충돌까지 빚은 적이 있었다. 당시 연개소문이 양만춘을 적으로 만들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그 자신과 고구려의 운명을 위해 더없는 행운이 되었다.
요동성의 복제품쯤으로 인식되었던 안시성은 양만춘의 탁월한 솜씨로 오히려 요동성을 능가하는 진품 걸작으로 바뀌어 있었다. 따라서 복제품을 대하는 것과 같은 공략으로는 부술 수 없었다. 안시성 수비군은 적이 포차를 날리면 숨었고 충차를 부딪히면 그 구멍을 메웠다. 심지어 당군은 성벽과 맞먹는 높이의 토산까지 쌓았으나 고구려군은 성벽을 더 높이며 항전했다. 토산이 무너지며 성 한측을 무너뜨리자 번개같이 달려들어 거뜬히 수리했다. 밤낮으로 두 달간을 공략한 끝에 당 태종은 안시성을 부술 수 없음을, 아울러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워낙 애를 먹어 성을 정복하면 성 안의 남자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넣어 죽일 마음까지 품었지만 태종은 분명 당대의 영웅이었다. 양만춘이 성벽에 올라 철수하는 당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태종은 그에게 비단 100필을 보내 적의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랴오둥의 고구려 성 10개를 손에 넣었고 7만의 백성들을 중국으로 이주시켰으니 성과가 적지 않았지만, 전쟁은 중국의 패배였다. 그러나 수 양제도 그랬던 것처럼 당 태종도 고구려 정벌을 1차전으로 끝내려 하지는 않았다. 패전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회복된 646년에도 그는 1차전에서 활약한 이적(李勣, 원래 이름은 세적世勣이었으나 ‘世’ 자가 이세민과 같기에 ‘勣’으로 줄였다)에게 고구려 침공을 명했고, 이듬해에는 산둥에서 수군으로 침략하게 했으며, 또 그 이듬해에도 고구려를 공략했다. 하지만 양만춘이 막아준 1차전 이후 정신을 차린 연개소문은 그때마다 뛰어난 전술 운용으로 잘 방어해냈다. 결국 649년 당 태종이 죽음으로써 이 대회전은 막을 내렸다(일설에 의하면 그는 안시성 싸움에서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이 멀었고 그 독으로 인해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의 죽음으로 영웅의 시대는 끝났다. 공존할 수 없었던 영웅들 간의 승패를 굳이 따진다면 이세민은 끝내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니 패장이 될 터이고 연개소문과 양만춘은 승장이 되겠지만, 나라의 운명은 정반대다. 이세민이 반석 위에 올린 당나라는 강력한 제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다시금 한나라 시대와 같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복원을 노리고 있었고, 연개소문이 사실상 지배한 고구려는 거듭되는 전란으로 국력이 약해지면서 한반도 내에서조차 패권을 주장하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 전쟁의 승부를 결정한 전투 안시성 전투의 기록화다. 당군은 랴오둥의 거의 모든 성들을 함락시켰지만 유독 이 안시성만은 무너뜨리지 못했다. 고구려의 야전군이 궤멸한 뒤에도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이 살아남았기에 당 태종은 또 다시 패전의 눈물을 뿌려야 했다. 그러나 안시성은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큰 성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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