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신라인③
장보고는 문성왕에게서 청해장군이라는 직함을 받은 것에 만족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에 이르기까지 그는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었다. 심지어 840년에 그는 일본에 무역을 요청하는 특파원까지 마음대로 보낼 정도였으니 사실상 신라의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진 자의 욕심이란 원래 끝이 없게 마련이 아니던가? 비록 자신이 직접 신라의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킹메이커의 자리만큼은 계속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방책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딸을 왕비로 만들면 되니까. 근친혼이 행해지던 왕실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그에 따르면 신라 왕비는 무조건 김씨나 박씨여야 한다) 장보고는 딸을 둘째 왕후로 집어넣으려 한다. 예상했듯이 문성왕은 장보고의 절대적 지원으로 팔자에 없던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니 싫든 좋든 반대할 처지가 아니다. 그러나 장보고는 이미 신라의 왕권이 실추될 대로 실추되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고, 왕 대신 실권을 쥔 경주 귀족들은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거센 반대로 결국 장보고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지만, 거기서 멈출 거였다면 아예 걸음을 떼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연 이듬해에 그는 공식적으로 반기를 든다. 그가 킹메이커일 뿐만 아니라 ‘킹킬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문성왕과 경주 귀족들은 이제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다. 공포에 휩싸인 그들에게 구원의 검은 손길이 다가온다. 일찍이 김우징의 쿠데타에서 공을 세웠던 염장(閻長)이라는 자가 단신으로 장보고를 암살하겠노라고 장담한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처지인 문성왕은 반신반의했지만 알고 보니 그 지푸라기는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염장은 문성왕을 배반한 것처럼 가장하고 장보고에게 접근해서는 환영석상에서 그를 찔러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장보고의 카리스마에 의존했던 청해진은 한때 동아시아 해상을 지배했던 근거지답지 않게 일순간에 몰락한다.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신라의 왕권마저 넘볼 수 있었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당나라가 더 이상 동아시아 질서의 축으로 역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렸다. 변방의 번진들은 사실상의 독립국이 되었고, 중앙의 황실은 환관들이 쥐고 흔드는 판이다(안사의 난 이후 황실에서는 감군사를 보내 번진을 감독하게 했는데, 그 임무를 맡은 게 바로 환관들이었다). 오죽하면 이 무렵의 황제들을 따로 부르는 이름까지 생겼을까? 9세기 초반의 덕종부터 당나라가 문을 닫는 907년까지 100년 동안 11명의 황제들 중 한 명만 제외하고는 모두 환관들이 옹립했는데, 환관의 테스트를 거쳐 제위에 올랐다 해서 이 황제들은 ‘문생천자(門生天子)’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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