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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안방의 세계 제국: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당현종, 안록산의 난, 조용조, 부병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안방의 세계 제국: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당현종, 안록산의 난, 조용조, 부병제)

건방진방랑자 2021. 6. 6.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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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

 

태종이 정관의 치를 펼쳤다면, 현종의 치세는 개원(開元, 현종의 연호)의 치라고 부른다. 이 무렵 당은 정치도 안정되고, 경제ㆍ사회ㆍ문화ㆍ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 전성기를 맞았다. 외척 정치를 직접 깨부수고 황제가 된 현종은 당연히 외척과 환관을 멀리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일까? 아니면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인륜을 저버리는 게 당 황실의 전통으로 굳어져버린 탓일까? 치세 40년 가까이 되자 현종은 며느리 양귀비에게 빠져 국사를 등한시하기 시작한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을 중용한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을 부른다.

 

원래 양국충과 사이가 좋지 않던 절도사 안녹산(安祿山)은 양국충이 재상으로 전권을 장악하자 그것을 구실로 755년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안녹산의 부하 사사명(史思明)에게 이어졌고, 9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이것을 두 사람의 성을 따 안사(安史)의 난이라고 부른다. 반란군이 장안을 함락시키는 바람에 현종은 수도를 버리고 쓰촨까지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훗날 시성(詩聖)으로 추앙 받은 두보(杜甫)는 안사의 난으로 고생하는 전국 각지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시로 전해주었다.

 

그러나 두보가 묘사한 백성들의 고통은 안사의 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한 안사의 난도 안녹산과 양국충의 갈등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정한 원인은 당 제국이 때 이르게 노쇠해가고 붕괴의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현종 치하의 개원의 치는 제국의 전성기인 동시에 퇴조기의 시작이었다.

 

 

양귀비 서양의 클레오파트라에 해당하는 동양의 미녀인 양귀비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영웅들과 사귀었으나 양귀비는 시아버지인 현종과 불륜의 사랑을 나눈 대가로 현종의 사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국충이 중용된 것은 측천무후 시절에 외척 세력과 전통의 관롱 귀족이 무너지고 힘의 공백이 생긴 데도 원인이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계기는 대토지 겸병이 성행하면서 농민들이 몰락하는 것이었다. 무릇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항상 토지가 남아돌게 마련이다. 이전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 새로 농민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중기쯤 되면 새로 분급할 토지가 사라진다. 미개간지를 개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데, 인구는 자꾸만 늘어나고 나라 살림은 갈수록 커진다. 먹고살기 힘들어진 농민들은 토지를 팔아넘기고, 그 토지를 부패한 지방 관리나 대토지 소유자 들이 사들이거나 빼앗아 겸병한다. 중기에 든 당 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지방 관리의 횡포와 상업 자본, 고리대 자본의 압박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빈궁해졌다. 게다가 관료 기구가 팽창하고 변방에서 전란이 끊임없는 데다 황실의 사치까지 겹쳐 국가 재정도 메말라갔다.

 

당의 토지제도인 균전제(均田制)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급하고 국가에서 조세를 걷는 방식이다. 따라서 농민들이 주어진 토지를 제대로 경작해야만 백성들의 살림살이도 나아지고 국가 재정도 튼튼해진다.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이 농사를 팽개치고 토지에서 이탈해버리면 모든 게 어긋날 수밖에 없다. 현종 대에 이르러 그런 현상이 대폭 증가했다. 균전제가 붕괴하는 것은 균전제에 뿌리를 둔 모든 제도가 무너진다는 것을 뜻한다. 우선 국가의 기틀인 국가 재정과 국방이 흔들린다. 균전제는 토지와 농민을 하나로 묶어 조세와 병역을 부담시키는 것이므로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 앞에서 본 일본의 조용조 제도는 당의 것을 모방했다)나 병역제도인 부병제(府兵制)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농민들이 토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판이니 국가에서 조용조를 제대로 거둘 수 없었다. 당장에 큰일은 나라를 지킬 병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제 균전제(均田制)를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기란 불가능해졌다. 제멋대로 소유권이 이전된 토지를 개국 초기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가 봐도 고육지책이지만, 결국 정부에서는 조세제도와 병역제도를 개선해서 버티기로 작정했다.

 

 

성인과 신선 당의 시문학은 오늘날까지도 고금을 통틀어 최고 수준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위쪽은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두보(杜甫)이고, 아래쪽은 시선(詩仙) 이백(李白)이다. 이백은 호방하고 낭만적인 시를 쓴 반면, 개인적으로 안사의 난 때문에 존경을 겪은 두보는 사회성이 짙은 시편을 많이 남겼다.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지는 사회적 혼란이 두보 작품의 배경이었던 셈이다.

 

 

우선 세금 제도에서는 조용조(租庸調)를 버리고 양세법(兩稅法)을 실시했다. 기본적인 골격은 토지를 부과 대상으로 삼는 것인데, 1년에 두 차례 징세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양세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 취지는 두 가지다. 첫째, 조용조는 먹을 것[]과 입을 것[調], 그리고 국가사업이 있을 때 노동력을 부리는 것을 뜻하므로 모두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세금이다. 그런데 사회가 발달하고 다변화됨에 따라 농민만이 아니라 상업,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백성도 많아졌다. 조용조를 고집하면 농사를 짓지 않는 이들에게서 세금을 거둘 방법이 없다. 이 문제를 해소하고자 한 게 양세법이다. 둘째, 토지가 거의 사유화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대토지 소유가 엄존하고 있는 마당에 애초에 농민들에게 분급한 토지를 기준으로 세액을 매길 수는 없다. 그보다는 토지 소유자에게 재산세를 물리는 편이 낫다. 이리하여 양세법은 모든 세금을 토지 기준으로 단일화하고(조용조 제도에서는 정식 세금인 조용조 외에 잡세로 불리는 기타 세금들이 많았다), 이것을 여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내도록 했다. 6월에는 호세(戶稅), 11월에는 지세(地稅)를 받았는데, 백성들의 토지와 재산 소유 여부에 따라 세액을 매기고 현물 대신 돈으로 납부하도록 했다조용조(租庸調)가 전근대적 세제라면 양세법(兩稅法)은 고대에 성립되었어도 근대식 세제에 해당한다. 조용조는 토지의 사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양세법은 사적 토지 소유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양세법은 수명도 길어 20세기 중반 중국이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환골탈태할 때까지 시행되었다. 하지만 현물 대신 화폐로 납부하는 방식은 화폐경제가 도입되기 전까지 늘 실패했다. 명대의 은납제(銀納制)는 당의 양세법(兩稅法)보다 600년이나 뒤에 시행되었는데도 실패했다.

 

양세법을 시행한 결과 정부는 농민 외에 상인이나 유통업, 숙박업자들에게서도 세금을 징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토지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서는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기틀이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운 법이다. 양세법도 금세 한계를 드러냈다. 조용조보다는 분명히 진일보한 세제였지만 더 나빠진 점도 있었다. 조용조(租庸調)의 경우에는 분급한 토지에 따라 세액을 결정할 수 있었지만, 양세법의 경우에는 과세의 표준이 없었다. 양세법을 유지하려면 정확한 토지조사를 수시로 해야 하는데, 힘을 잃어가는 당 조정으로서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

 

원래 중국에서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왕토 사상(王土思想)의 이념에 따라 나라의 모든 것이 왕의 소유였다. 토지 생산물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이나 토지에서 소작료를 거두는 지주의 몫이지만, 토지 자체는 근본적으로 국가, 즉 천자의 것이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소유권의 양도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소유권의 개념 자체도 희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토지의 사적 소유를 전제로 하는 양세법(兩稅法)은 현실적으로 말끔하게 적용되기 어려웠다.

 

부패한 지방관들은 양세법이 도입되자 더욱 심하게 농간을 부려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또한 화폐로 세금을 내는 금납제(金納制, 은납제와 같은 의미다)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곡물과 베를 수확하고 나서도 그것을 돈으로 바꿔 세금을 내야 했다. 물건을 팔아 돈을 사는 격이었으니, 과정에서도 농민들은 큰 손해를 보았다.

 

 

 

 

새로운 세금 제도가 좌초한 것과 더불어 병역제도를 개선하려는 노력도 실패로 돌아갔다. 부병제(府兵制)는 원래 병농일치(兵農一致)를 기본으로 하는 징병제다. 즉 변방의 농민들에게 다른 세를 면제해주는 대신 농한기에 군사 훈련을 시켜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토지를 이탈해버리면 부병제는 유지할 수 없게 된다(부병제의 가혹한 부담으로 인해 도망치는 농민들도 많았으니 뭐가 원인이고 뭐가 결과인지 모를 일이다).

 

병역 의무제를 유지할 수 없다면 상비군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병역제도는 점차 징병제를 포기하고 모병제와 직업군인 제도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종의 용병이므로 자신을 고용한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게 마련이다. 당 초기에는 변방에 도호부를 설치했지만,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아지자 그것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더 강력한 경비 체제로 절도사를 두었다. 당시 변방에서 절도사는 군사권만이 아니라 행정권과 재정권도 지니고 있어 왕이나 다름없었다. 모병된 병사들은 절도사의 사병(私兵)으로 전락했다. 안녹산이 손쉽게 장안을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병 조직을 거느린 절도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사의 난을 계기로 반란에 더욱 예민해진 정부는 변방에 둔 절도사를 국내 요지에 두루 배치했는데, 이들은 정부의 의도를 거슬러 번진이라는 군벌로 성장했다. 결국 훗날에 당은 이들 번진에게 나라를 내주게 된다당 제국이 실시한 조용조(租庸調)와 부병제(府兵制)는 한반도와 일본에도 도입되었다(그런 점에서도 당은 중화 세계의 기틀을 이룬 제국이다). 조용조는 신라시대에 도입되어 조선에도 존속했으며, 부병제는 고려가 채택했다. 일본은 앞에서 본 것처럼 중화 세계에 속했던 7세기 중반에 다이카 개신으로 중국의 문물을 전면 모방하면서 조용조를 시행했다. 다만 일본은 국가 통일을 16세기에나 이루었으므로 부병제(府兵制)는 시행할 수 없었다.

 

 

이렇듯 사회경제가 무너지자 더 이상 율령 정치도 불가능해졌다. 당 제국을 있게 한 율령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정치 현실은 더욱 혼탁해졌다.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외척과 환관은 중국 역사에서 전통적인 정치 불안 요소였다. 측천무후와 위씨 황후의 몰락을 계기로 외척 세력은 잡았다 싶더니 이번에는 환관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원래 환관은 개국 초부터 황실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던 집단이었는데, 현종 때부터는 직접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안사의 난에서 교훈을 얻은 후대의 황제들은 절도사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감군사(監軍使)를 보내 그들을 감독했는데, 환관들이 주로 그 업무를 맡았다. 이래저래 환관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당 말기인 9세기에 이르면 환관들의 세력은 황제도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환관들은 자신들을 제어하려 한 황제 두 명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하나의 세력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면 다음부터는 자기들끼리 다투게 마련이다. 이윽고 환관들은 자기들끼리 편을 갈라 당쟁을 벌였다. 9세기 초반의 덕종(德宗) 이후 당 제국이 문을 닫는 907년까지 100년 동안 열한 명의 황제들 중 한 명만 제외하고는 전부 환관들이 옹립했다. 환관의 시험을 거쳐 제위에 올랐다고 해서 이 황제들을 문생천자(門生天子)’라고 부를 정도였다(문생이란 과거에 갓 급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니 천자가 졸지에 환관의 문하생이 된 것이다).

 

 

절도사의 세상 당 중대에 절도사들의 배치 상황이다. 중앙이 튼튼하다면 아주 좋은 수비 형태겠지만, 안사의 난 이후 중앙 정부가 힘을 잃은 사정에 비추어보면, 절도사들이 국경을 수비게 아니라 오히려 중원을 둘러싼 채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절도사들은 점차 번진으로 성장했고, 가장 힘센 절도사가 당 제국을 접수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반복되는 역사

중화 세계의 중심으로

해프닝으로 끝난 복고주의

정점에서 시작된 퇴조

쓰러지는 세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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