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진통②
불행히도 진성여왕은 200년 전의 선배들과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지 못했다. 그때는 비록 왕실은 흔들렸어도 나라는 튼튼했을뿐더러 무엇보다 진골 귀족들의 충실한 지원을 받았으니까. 역사서에는 여왕이 즉위 초부터 삼촌인 김위홍(金魏弘)과 놀아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고립무원인 그녀로서는 그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근친혼 시대에 삼촌과 조카의 사랑은 전혀 욕먹을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고려 왕실에서도 이런 경우는 흔히 볼 수 있다). 그 전부터 두 조카(헌강왕과 정강왕)를 충실히 보좌했던 김위홍은 사실상 진성여왕에게서 국정을 위임받고 왕처럼 군림했다. 승려인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을 공동 편찬한 것을 보면 그는 상당한 문화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던 듯 싶다【『삼대목』은 지금 전하지 않지만 888년에 편찬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노래집이다(‘삼대’란 신라의 상대ㆍ중대ㆍ하대를 뜻한다). 현전하는 향가는 『삼국유사』와 『균여전(均如傳)』에 실린 25편이 고작인데, 아마 『삼대목』이 전해졌더라면 수백 편의 각종 향가들을 통해 신라의 사회와 문화는 물론 우리의 옛말에 관해서도 상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지금은 오히려 8세기경에 간행된 일본 최초의 노래집 『만엽집(萬葉集)』을 통해 우리 고대어를 연구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무렵에 흘러간 옛노래와 최신곡들을 문헌으로 집대성한 이유는 뭘까? 거기서도 역시 ‘흔들리는 중국’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도 9세기부터 당풍에서 국풍으로 문화의 조류가 바뀐 것을 보면 신라에서도 어느 정도 그와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중국이 흔들릴 때마다 고유의 것을 찾는 주체적 풍조가 유행하는데, 이를테면 원나라가 약화된 고려 말과 중국 대륙에 청나라가 들어선 조선 후기를 예로 들 수 있다】.
『삼대목을 마지막 업적으로 남기고 김위홍이 죽은 것은 진성여왕에게 무엇보다도 큰 상실이었다. 삼촌이자 내연의 남편이자 의지할 버팀목이 사라졌으니 그녀가 만사에 의욕을 잃은 것은 당연하다. 궁중에 미소년들을 불러들여 음행을 즐긴 것은 그런 후유증이었다. 어렵사리 정신을 차리고 최치원(崔致遠)의 시국 수습책을 받아들였으나 여왕을 우습게 본 귀족들은 이미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고 보면 최치원의 실패는 필연적이었던 셈이다. 진성여왕은 아들도 없었지만 설사 있었다 해도 후계자로 삼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오빠 정강왕이 언젠가, 어디선가 낳아둔 서자를 받아들여 태자로 삼고 재위 10년 만에 죽는다.
이렇게 해서 다시 한 번 비정상적인 여왕의 치세가 끝나고 897년에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 ~ 912)이 즉위하지만, 신라는 이제 왕실만이 아니라 전국이 비정상이다.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사실상의 왕처럼 군림한다. 오죽하면 효공왕은 이런 편지를 당 나라에 보냈을까? “지금 전국은 모두 도둑들의 소굴이 되었고 산천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어찌해서 하늘의 재앙은 우리 해동에만 흘러드는 것입니까?” 물론 당나라의 조정도 마찬가지 처지였으니 해동에만 재앙이 깃든 것은 아니지만, 효공왕은 그렇게나마 참담한 심정을 호소하고 싶었을 게다. 그러나 푸념은 푸념일 뿐이고 당장 그로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우선 시급한 일은 경주 귀족들을 무마하는 일, 그래서 그는 모든 중앙 관리를 일계급 특진시킨다. 하지만 진성여왕을 농락한 경주 귀족들이 궁궐 바깥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졸지에 왕이 된 효공왕을 충심으로 대해줄 리는 만무하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16년이나 왕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깝다.
효공왕에게 후사가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죽자 귀족들이 다음 왕으로 추대한 인물은 놀랍게도 박경휘(朴景暉)라는 사람이다. 그가 신라의 53대 왕인 신덕왕(神德王, 재위 912~917)인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박씨가 왕이 되다니 대체 웬일일까? 가장 최근의 박씨 왕은 무려 700년 전의 아달라왕이었고, 4세기의 내물왕(奈勿王) 이래 신라 왕계는 김씨만으로 이어져왔으니 박씨는 그동안 신라 왕계와는 전혀 무관한 성씨다(실제로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먼 후손이라고 한다). 왕실에 득시글거리는 수많은 김서방들을 두고 박서방을 추대할 정도라면 모르긴 몰라도 상당한 진통이 있었을 것이다.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아마도 그 진통은 왕실 내의 박씨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가 아니었을까? 912년부터 15년 동안 박씨는 삼대(신덕왕- 경명왕 - 경애왕)에 걸쳐 신라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박씨의 집권이 쿠데타라고 추측할 수 있는 근거는 곧 밝혀진다.
▲ 난세의 향락 대내외적으로 난세였던 헌강왕 시절 경주의 분위기는 번영의 끝물을 말해주듯이 질탕한 향락이었다. 아마 처용은 당시에 꽤나 인기있는 난봉꾼이었던 듯하다. 그가 남긴 신라 최후의 향가인 「처용가(處容歌)」는 흥청망청하는 서라벌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삼대목』이 편찬된 것도 향락의 시대였기 때문이리라. 그림은 당시에 유행하던 댄스인 처용무인데, 조선시대 왕실 연회에서 공연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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