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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무한 내전의 출발: 모방을 버리고 독자 노선으로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6장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무한 내전의 출발: 모방을 버리고 독자 노선으로

건방진방랑자 2021. 6. 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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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방을 버리고 독자 노선으로

 

일본이 진통을 겪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동북아시아 전체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국제 질서의 핵심이었던 당 제국은 8세기 중반 안사의 난 이후 당말오대의 말기적 증상에 시달렸다. 당의 율령제가 붕괴하는 시기와 일본의 율령제가 붕괴하는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일본은 율령제의 성립만이 아니라 붕괴까지도 모방한 셈이다. 아니면 율령제의 한계가 그랬거나.

 

그러나 중국의 동요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한반도와 일본은 서로 달랐다. 통일신라는 당과 함께 중앙 권력이 무너지고 혼란기에 빠졌으나신라는 당과 함께 말기적 증상을 보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난 8세기 중반의 혜공왕(재위 765~780)부터 당이 수명을 다하는 9세기 말 진성여왕(재위 887~897)까지 신라 왕들은 무려 열네 명이나 되었으며(평균 재위 기간은 10년이 못 된다), 그 가운데 네 명이 반란으로 살해되었고 여섯 명이 병사나 의문사 등 비정상적으로 죽었다. 이 시기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불길한 징조가 많이 나오는데, 정변이나 반란이 그렇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당과 결별하고 독자 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9세기 말에 당의 붕괴가 확실시되자 일본은 더 이상 중국에서 배울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때까지 10여 차례나 파견한 견당사(遣唐使, 당에 보내는 공식 사절단)도 보내지 않았으며, 이 시기에는 무역량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중국에 유학하는 학생도 없었다. 백제가 망할 무렵 한반도에서 배울 게 없다고 여기고 재빨리 손을 빼 한반도와의 교류를 끊은 것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그에 따라 한동안 중국풍을 모방하는 것만이 최고라고 여겼던 일본의 문화도 궤도를 급선회했다. 종전의 풍조를 당풍(唐風), 새로운 풍조를 국풍(國風)이라 부른다(국풍은 야마토풍大和風이라고도 한다). 일본 고유의 문화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은 이때부터다.

 

 

선진국으로 가는 배 그림은 8세기에 당과 일본을 오갔던 견당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뱃길이 무척 험했으므로 이들을 태운 배는 풍랑에 휩쓸려 침몰하기도 부지기수였을 뿐만 아니라 오가는 데도 몇 달씩 걸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항해술은 이후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불교의 성격도 확연히 달라진다. 불교가 도입된 초창기인 쇼토쿠 태자 시절의 불교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 불교였어도 종교의 성격이 명확했다. 그러나 다이카 개신 이후 귀족 지배기를 거치면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귀족들의 개인적 질병이나 재앙을 막아주는 주술적 용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주술과 기도를 특징으로 하는 진언종(眞言宗)이 널리 퍼졌고, 천태종(天台宗)이 밀교처럼 변질되었다. 훗날 일본의 불교가 무속이나 민간신앙, 혹은 일본 고유의 신사(神社) 신앙과 뿌리 깊은 연관을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언제 중국의 것을 모방하기에 급급했느냐는 듯이 일본의 정치적ㆍ문화적 노선 전환은 순식간이었다. 그 덕분에 일본은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매우 귀중한 유산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일본 문자인 가나(假名).

 

한자를 간소화해 일본어를 표기하는 표음문자로 처음 사용한 것은 5세기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의 노래책인 만요슈(萬葉集)에 나오는 만요 가나는 훗날 가나 문자의 모태가 된다. 국풍이 등장한 9세기 중반에는 수백 년 동안 조금씩 발전되어오던 가나가 총정리되어 정식으로 일본어를 표기하는 문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일본의 학자들은 한글이 15세기에 생겼다는 이유로 가나가 중국을 제외한 중국 문화권에서 최초로 만든 문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문제가 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말은 있어도 표기할 문자는 없었던 한반도에서는 고대부터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吏讀) 문자를 사용했다(이두를 신라의 학자 설총이 창안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가나는 비록 한자를 간소화했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한자체를 그대로 사용하는 문자이므로 새롭게 창안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두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두의 역사로 보면 일본이 결코 먼저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가나에 비해 한글은 한자와는 상관없이 우리말을 표기하는 체계라는 점에서 훨씬 더 독창적이다.

 

가나는 처음부터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한동안 여러 가지 표기 방식이 사용되다가 점차 하나의 발음에 하나의 문자가 대응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나 문자는 여전히 중국풍에 젖어 있던 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물론 공문서를 작성할 때도 사용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자를 배우지 못한 하층민이나 여인네 들이 애용하면서 가나는 점차 일본인들의 생활 속에 자리 잡았다(이 점은 한글의 운명과 비슷하다. 한글도 만들어진 세종 대에만 경전의 번역에 이용되었을 뿐 공식 문자로 대우받지 못했고 평민과 여성 들이 애용하면서 발달했다). 특히 가나 문자를 사용한 새로운 문학 장르인 모노가타리(物語)는 일본 전통 문학의 시초가 되었다.

 

9세기부터 일본 역사에서 국제 관계의 맥락이 거의 사라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때부터 일본은 중국과 비공식적으로 무역을 했고 왜구로서만 동양의 역사 무대에 등장했을 뿐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는 무대 뒤에서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하게 된다(13세기에 몽골의 침략을 두 차례 받은 게 대외 관계의 전부다).

 

이후 일본은 치열한 내전의 시대를 거치면서 통일을 이루고 힘을 키워 16세기에 국제 무대에 다시 등장하는데, 나중에 보겠지만 이때도 정상적인 국제 관계를 도모한 게 아니라 그동안 한껏 키운 무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정복을 꾀한 것이었다.

 

 

최초의 일본 문학 11세기 초 일본 귀족 사회의 모습을 잘 묘사한 소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 수록된 그림이다. 일본의 문화가 당풍에서 국풍으로 바뀌면서 일본의 독창적인 문학 형식이 생겨났다. 가나 문자를 사용한 최초의 문학인 모노가타리는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일본 문장으로 손꼽힌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모방의 한계

귀족이 주도한 율령제

순수 무장의 집권

모방을 버리고 독자 노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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