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쿠데타?②
졸지에 해결사로 나서게 된 이성계는 고민한다. 마음으로야 그도 자신의 고향인 화령(영흥)이 있는 철령 이북의 땅을 명나라에게 내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랴오둥을 정벌하라는 최영의 강경책은 지나치다 못해 황당할 정도다. 그래서 그는 그 전략이 무모하다는 점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약소국이 상대국을 치는 격이고, 그 틈을 타서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으며, 농번기에다 장마철인 여름에 군대를 움직이면 농사를 망칠 뿐 아니라 전염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게 그의 논지다. 그러나 최영의 의지는 단호했다(아마 최영은 무리한 랴오둥 정벌을 계기로 라이벌 이성계를 제거할 의도를 품었을 테고 이성계 역시 그 점을 알았기에 반박했을 것이다). 일단 상관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북진 길에 올랐으나 이성계의 심경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1388년 5월 압록강 하류의 작은 섬 위화도에 이른 이성계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대외적으로는 10만 대군이라고 허풍을 쳤지만 실은 전 병력을 합쳐도 5만에 불과한 데다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도 이미 도망병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때마침 큰 비가 내리고 있으니 더 이상 진군하기도 어려운 처지다. 그런데도 서경에 있는 최영과 우왕은 현지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독촉과 채근만 거듭할 뿐이다. 그를 사지에 몰아넣으려는 최영의 속셈은 불을 보듯 뻔하다. 과연 최영은 랴오둥 정벌에 뜻이 있는 걸까, 아니면 정적의 제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걸까?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결정한다. 이것이 조선 건국의 발단이 된 위화도 회군이다. 물론 당시까지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구국의 결단이겠으나 최영이 보기에는 당연히 반란이다. 랴오둥 정벌군이 말머리를 돌렸다는 소식을 들은 최영은 급히 개경으로 내려가서 방어 태세를 갖춘다. 사기가 떨어져 진군할 수 없다던 이성계의 보고는 아마 거짓이었던 모양이다. 갈 때는 느렸어도 돌아오는 속도는 무척 빨랐으니까. 순식간에 개경에 도착한 반란군은 최영의 수비군을 손쉽게 무찌르고 개경을 장악한다. 반란군이 정부군으로 바뀌자 이성계가 맨먼저 한 일은 최영을 유배시킨 것이었다【최영은 자신의 고향인 고봉(지금의 고양)에 유배되었다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합포로 옮겨져 목숨은 건지는 듯했으나 곧 개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비록 시대착오적이고 수구적인 대세관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청렴하고 올곧은 삶을 살았기에 그는 오늘날 이성계보다 인기있는 ‘위인’이 되었다(이성계도 조선을 세운 뒤 1396년에 그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넋을 기렸다). 지금도 매년 단오날에는 부산의 사당에서 최영 장군제가 열리며, 무속인들은 그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기도 한다. 고양에 있는 그의 묘는 풀이 자라지 않아 적분(赤墳)이라 불린다는데, 그 이유는 청렴함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품은 한 때문일까?】.
다음 수순으로 그는 우왕을 폐위시켰는데, 후사에 관해서는 조민수와 의견이 엇갈렸다. 이성계는 다른 왕족 중에서 발탁하려 했으나 조민수와 이색(李穡)은 우왕의 아들을 주장한 것이다. 어차피 왕권이 유명무실해진 마당에 왕위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일까? 결국 후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창왕(昌王, 재위 1388 ~ 89)이다.
▲ 역사를 결정한 섬 위화도는 압록강 하구의 작은 섬인데, 현재 북한의 영토다. 강을 마저 건너면 랴오둥이고 말머리를 돌려 강을 되건너면 조선이었으니 이성계가 고민하기에는 적절한 장소다. 섬의 면적으로 보면 아마 이성계와 조민수는 전군을 강 뒤편에 둔 채 수뇌부만 이 섬으로 와서 대책을 숙의했을 것이다. 위 지도에 붉게 표시된 부분이 위화도이고, 아래 사진은 오늘날 위화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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