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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영웅의 등장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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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3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남풍), 영웅의 등장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1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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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등장

 

 

이순신이 해상을 장악하면서 적의 보급선을 차단한 것은 육지에서도 역전의 계기가 된다. 하지만 군대가 없는데 어떻게 싸웠을까? 유명무실한 관군의 몫을 대신한 것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병대 즉 의병이다. 김천일(金千鎰, 1537 ~ 93), 고경명(高敬命, 1533 ~ 92), 곽재(郭再祐, 1552 ~ 1617), 조헌(趙憲, 1544 ~ 92), 그리고 승려인 휴정(休靜, 1520 ~ 1604, 서산대사)과 유정(惟政, 1544 ~ 1610, 사명당) 등이 이끄는 조선의 의병들은 절대 열세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적의 정예병들을 물리쳐 일본군의 북상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제자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당쟁의 근원을 만들었던 조식과 이황은 아마 지하에서 만족했을 것이다. 당시 의병장들 중에는 그들의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두 합치면 무려 60여 명이라고 하는데, 곽재우, 정인홍(鄭仁弘, 1535 ~ 1623), 김면(金沔, 1541 ~ 93)은 그들 중 3대 의병장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정치적 행적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김면은 의병 활동을 하던 중 병에 걸려 죽으면서 이순신보다 앞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기개가 높았으며, 곽재우는 종전 후 혼탁한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할 만큼 절개가 있었으나, 조식의 수제자였던 정인홍은 전쟁이 끝나고 북인의 보스가 되어 당쟁에 뛰어들었다.

 

관군 장수들 중에서 제 몫을 다한 인물은 진주를 지켜낸 김시민(金時敏, 1554 ~ 92)과 행주산성 싸움의 주역인 권율(權慄, 1537 ~ 99) 정도다.

 

처음부터 전쟁의 한 당사자가 되어야 할 명나라가 참전하는 건 이렇게 전황을 어느 정도 복구해 놓은 다음이다. 선조(宣祖)의 요청에 따라 명 나라에서는 파병 문제를 논의하는데, 마침 명의 조정에서도 당쟁이 만연해 있는 사정은 마찬가지였다(당시 중화세계의 지배층에게 중요한 일은 오로지 당쟁뿐이었다). 의견 통일을 이루지 못하자 15927월에 임시변통으로 겨우 5천의 지원군을 편성해서 파견했으나 그 정도로는 달걀로 바위치기다. 예상대로 원군이 일본군에게 대패하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명 황실에서는 항전이냐, 휴전이냐를 두고 5개월이나 질질 끌다가 결국 둘 다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그 해 12월에 랴오둥 수비대장인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의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하는 한편, 심유경(沈惟敬)이라는 자를 보내 일본 측과 화의를 꾀했던 것이다(사실 화의는 이미 유성룡과 성혼 같은 사람들이 주장했으나 명나라가 결정할 사항이므로 묵살된 바 있다. 오히려 두 사람은 그 때문에 종전 후에 탄핵을 받게 된다).

 

일단 이여송의 군대는 평양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한양을 수복하려다 벽제(碧蹄)에서 다시 브레이크가 걸린다. 개성으로 물러난 명군과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 애초에 일본을 쉽게 봤던 명나라와 애초에 조선쯤은 쉽게 먹을 줄 알았던 일본, 양측의 전선이 교착되면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휴전으로 향한다.

 

 

 구국의 영웅 조선의 육로를 통과해서 중국을 치겠다는 게 도요토미가 공개한 침략 의도였으나, 정작 그것을 막아낸 것은 조선의 육군도 중국군도 아닌 이순신이었다. 그림은 그의 전매특허인 학익진이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뒤 그토록 굴욕적인 휴전협상이 진행될 줄 알았더라면 전투에 임하는 이순신의 어깨도 늘어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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