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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4장 해방 그리고 분단, 두 개의 정부, 분단의 확정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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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2부 식민지ㆍ해방ㆍ분단 - 4장 해방 그리고 분단, 두 개의 정부, 분단의 확정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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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정부, 분단의 확정

 

 

하지만 김구와 김규식의 마음은 착잡하고 초조하다그들과 답답한 심정을 함께 나눌 여운형은 1947년에 암살되었다. 남한 내에서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심화될 조짐을 보이자 그는 1946년 초부터 김규식, 허헌 등과 함께 좌우 합작을 도모했으며, 여기서 성과를 얻어 미 군정청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것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아마 남북 분단도 극복될 수 있었을 테지만, 불행히도 여운형은 평양에까지 가서 김일성을 만났으나 협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다(이때 이미 김일성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합작이 아니면 동의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이후 그는 온건 좌파로 세력을 재편하고 계속 좌우 합작을 추진하다가 한지근이라는 자에게 암살당했는데, 범인은 이승만 계열의 똘마니였을 게 거의 확실하다. 미 군정청까지 동의한 좌우 합작을 이승만과 김일성이 모두 거부함으로써 비극적인 죽음까지 맞았으니 여운형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원래 될성부른 떡잎은 늘 반대파에 의해 제거되는 게 우리 역사였으니 그의 죽음도 이제 낯설지 않다).

 

다급한 마음에 그들은 북한의 김일성에게 남북 지도자 회담을 열자고 제안하는 서신을 보내지만 답장을 받을 가능성은 제로다. 결국 19482UN 소총회에서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추진한다는 결정이 표결로 통과되면서 남북 분단이 사실상 확정되었다. 북한이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그 다음 달에 북한은 방송과 서신을 통해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연석회의를 갖자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하지만 회의 개최 장소를 평양으로 일방적으로 정한 데다 초대장은 김구와 김규식 등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정파에게만 보내왔으니 속셈은 뻔하다. 그래도 4월에 열린 회의에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趙素昻, 1887 ~ 1958) 등 남한 지도자들이 참가했으나 정작으로 분단 극복에 관한 사항은 아무것도 논의되지 못했다(논의되었더라도 남한의 실세가 빠진 상태에서는 무의미했겠지만).

 

결국 남북협상은 오히려 이승만과 김일성에게 집권의 기회만을 더욱 강화시켜주었을 뿐이다. 이승만은 이미 단독 선거 방침을 확보했으니 남북협상파를 탄압할 구실을 얻었고, 김일성은 분단 극복을 위해 노력할 만큼 했다는 명분을 얻었다(이후에도 계속 통일을 주장하던 김구는 1949년 육군 장교인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는데, 이것 역시 이승만 일파의 공작임이 분명하다).

 

 

합작의 좌절 비록 김일성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깔아놓은 멍석이라지만 어떻게든 분단을 막아야 한다고 여겼던 김구는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은 19484월 평양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는 김구 일행이다. 그러나 칠십 줄에 들어선 원로 정객의 소망과는 달리 합작은 좌절되었고, 더욱이 이듬해에 김구는 암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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