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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집착 없이 살아가기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집착 없이 살아가기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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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없이 살아가기

 

 

이제 약속한 시간이 다가온 것 같습니다. 앞에서 여러분에게 화두 하나를 내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지요? 그때 저는 여러분께 약속했습니다. 이 화두만 풀 수 있다면 여러분은 깨달은 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미 화두를 푼 분도 있겠지만,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란 책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도록 하지요. 이 이야기는 깨달음, 즉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님 같지도 않던 스님 한 분이 단하(丹霞)라는 스님으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 날이 저물자 단하 스님은 하룻밤을 묵기 위해 혜림사라는 절에 찾아갔다. 그러나 이 절을 홀로 지키고 있던 스님은 단하 스님을 차가운 본당 마룻바닥에서 자게 했다. 잠을 청하려고 하다가 이 스님은 단하 스님이 있던 본당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곳으로 뛰어갔다. 문을 열고 보니, 단하 스님이 나무로 만든 불상을 쪼개서 태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스님은 단하

스님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스님이란 사람이 불상을 태울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단하 스님은 태연하게 말했다.

불상에서 사리가 나오는가 보려고 태웠습니다.”

그 스님은 단하 스님에게 역정을 내며 다시 말했다.

아니, 나무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다는 것입니까?”

이 말을 듣고 단하 스님은 환한 비소를 지었다. 그 순간 혜림사의 스님은 크게 깨닫게 되었다. 경덕전등록

 

 

자비의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혜림사의 스님이 도대체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요? 이 스님은 다른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을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이 불상은 싯다르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매일 정성스럽게 이 불상을 닦는 것이 그의 중요한 일과이기까지 했겠지요. 그런데 지금 이 불상을 단하 스님이란 사람이 불태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깜짝 놀라서 단하 스님에게 따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단하 스님은 능청스럽게도 사리를 찾으려고 태웠다는 말을 건넵니다. 불교에서는 화장이라는 장례법을 시행합니다. 그런데 깨친 스님들을 화장하면, 타고 남은 재 속에서 작고 반짝이는 물체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통 사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리를 찾으려고 불태웠다는 단하 스님의 말에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데가 있습니다. 사실 나무 불상을 진짜 싯다르타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혜림사의 스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상을 태워서 사리를 찾는 일은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단하 스님이 아니라 이 혜림사의 스님이 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혜림사의 스님은 오히려 화를 냅니다. 나무에서 무슨 사리가 나올 수 있느냐고 하면서 말이죠. 이 말 역시 참으로 아이러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 말이야말로 그가 아니라 단하 스님이 했어야 할 말이기 때문입니다. 혜림사의 스님은 불상을 부처라고 집착하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사실은 그것이 나무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토하게 된 것입니다. 갑자기 그는 있는 그대로보게 된 것이죠. 집착을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 이제 우리가 앞서 꺼냈던 화두를 풀 준비가 어느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직접 답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큰스님이 몽둥이를 들고 제자의 머리 위로 흔들며 말했다.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고, 이 몽둥이가 없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다. 만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너는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느냐, 없느냐?”

 

 

이 화두의 묘미는 제자가 이 질문을 듣자마자 대답할 수밖에 없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처럼 생각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엄청나게 몽둥이세례를 당하게 되겠죠. , 제가 흔들고 있는 몽둥이가 보이죠. “이 몽둥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혹시 불교에 대해 귀동냥이라도 한 분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몽둥이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있다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다는 것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등장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을 흉내낸 것이죠. 이 말은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이런 대답을 했다면, 저는 여러분을 여섯 대나 후려칠 것입니다. 몽둥이에 대해 여러분은 있다는 말을 3, ‘없다는 말을 이미 3번이나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두의 답은 무엇일까요? 답을 안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몽둥이로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화두가 던져지자마자 정확한 답을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깨달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화두의 대답은 하나가 아닙니다. 그중 몇 가지만 제시해볼까요? “바람이 시원합니다.” “새가 울고 있네요.” “하늘이 푸릅니다.” “개울 소리가 맑습니다.” 화두는 사실 아주 교묘하게 짜여 있었던 셈입니다. 몽둥이를 등장시킴으로써 여러분으로 하여금 몽둥이에 집착하도록 만들어버렸으니까요. 만일 몽둥이에 집착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몽둥이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있다고 해도 맞고 없다고 해도 맞습니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침묵인데, 침묵하여도 우리는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셈이죠. 그래서 이 화두에서 중요한 것은 있음도, 없음도, 그리고 침묵도 아닙니다. 오히려 핵심은 우리가 몽둥이에 집착하느냐, 집착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겠죠. 만약 몽둥이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깨달은 자라면, 우리는 하늘이 푸릅니다라는 생각지 못한 말로 이 딜레마로부터 가볍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몽둥이에 집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몽둥이가 아닌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하늘도, 구름도, 새소리도 들리거나 보이지 않게 될 테니까요. 마음이 몽둥이만을 담아두려고 하는 것이 바로 몽둥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몽둥이를 떠나보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 구름, 새소리 등 온갖 존재하는 것을 담아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원효 스님의 말처럼 집착이란 결국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속에 갇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집착은 여러분의 삶을 유아론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한때 아름답고 젊었던 자신의 외모에 집착하고 있지 않나요? 아니면 자신의 업적이나 성적에 집착하고 있지 않나요? 그것도 아니라면 떠나버린 사랑에 집착하고 있지 않나요? 혹은 돈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수많은 집착으로 인해 우리는 고통에 빠져들고 우리의 인생은 시들어갑니다. 여러분은 집착을 버리고 바깥으로 나오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는 반드시 나와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고통에 빠진 우울한 주체가 아니라, 다른 것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즐거운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중한 행복은 유아론적이지 않은 곳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일러스트 - 이승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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