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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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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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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

 

 

여러분은 우울한 주체가 아닌 즐거운 주체, 그리고 자발적 복종이 아닌 행복한 자유를 얻고 싶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제안하는 참된 주체, 즉 즐거운 주체가 되는 방법을 엿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우리에게 권하는 방법은 칸트의 정언명령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겠지요. 충실한 니체주의자였던 들뢰즈의 설명을 통해 니체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법칙에 대한 증오와 운명애(amor fati), 공격성과 동의는 차라투스트라의 두 얼굴이다. 성서에 호의적이고 다시 성서를 적대시하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여전히 특정한 방식으로 칸트와 싸우고 있다. 도덕법칙 안에 있는 반복(répétition)의 시험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éternel retour)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는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이것은 칸트류의 형식주의이지만, 칸트를 그의 고유한 영토에서 전복해버리는 형식주의이다. 여기에 (칸트의 명령법이 함축하는 시험보다) 더 멀리에까지 이르는 시험이 있다. 이는 미리 가정된 어떤 도덕법칙에 반복을 결부시키는 대신, 도덕을 넘어서는 어떤 법칙에 반복을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칸트는 우리에게 어떤 행위를 할 때 보편적 입법자인 것처럼 행동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던 입법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법칙에 대한 증오를 언급한 것입니다. 니체의 논의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장씨 부인이 세운 보편적 도덕법칙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보지요. 그녀는 자신의 학문 활동을 접고 봉건사회의 가치 규범을 수용하기로 결정할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세상이 없다면 무엇을 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 그 이상,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장씨 부인이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도덕법칙을 세울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마 자신의 학문 활동을 계속 영위하려고 계획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많은 여성이 바로 이런 이유로 다양한 전문 직종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고 또 그럴 수 있길 기대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니체는 법칙에 대한 증오를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운명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어진 삶의 조건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자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만약 이런 뜻이라면 이것은 도리어 법칙에 대한 수용이라고 불려야 하겠지요. 니체의 운명에는 영원회귀라는 그의 개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원회귀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와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과 세계는 주기적으로 똑같이 반복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1000년 뒤 다시 똑같은 나로 똑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가정해봅시다. 물론 오늘의 세계나 나도 이미 1000년 전에 있었던 똑같은 세계와 나 자신일 뿐입니다. 이렇게 1000년 주기로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된다고 생각해봅시다. 내가 오늘 어떤 책을 읽고 있다면, 1000년 전에도, 2000년 전에도 나는 똑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1000년 뒤에도, 2000년 뒤에도 나는 똑같은 책을 읽게 되겠지요.

 

만약 영원회귀가 옳다면 여러분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우울하고 불행한 일들,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것이 영원히 반복되는데도 말입니다. 타인의 강압에 비겁하게 굴종하겠습니까? 이런 굴종이 1000년 뒤에도, 2000년 뒤에도 똑같이 반복될 것인데도요? 아마 여러분은 가장 자유로운 행동, 가장 즐거운 행동, 가장 행복한 행동을 하려고 애쓸 겁니다. 그런 행동은 앞으로 영원히, 다른 삶에서도 반복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네가 무엇을 의지하는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했던 운명애의 내용입니다. 니체의 묘수풀이는 사실 우리가 1000년 전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운명애를 주어진 삶의 조건에 대한 체념이나 굴종으로 만들지 않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지금 나의 이 행동이 앞으로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것은 영원한 것이 될 겁니다. 이 점에서 그의 운명애는 미래로, 긍정으로, 행복으로 열려 있고, 우리를 즐거운 주체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정언명령으로 불릴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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