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는 나의 미래!
타자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친숙하고 편안한 세계에 낯섦과 불편함을 가지고 오는 무엇입니다. 타자가 규칙적이고 편안한 나의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그 타자가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의 삶을 가장 낯설게 만드는 사건은 바로 타자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도대체 그가 어떤 삶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니까요. 집에서 학교나 회사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어떤 사람과 마주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정지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이 그 한 사람에게 몰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강렬한 첫 만남을 경험해본 적이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느낌을 기억할 겁니다. ‘나는 나 자신이 어디에서 있는지, 그리고 왜 거기에 서 있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그 사람만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강렬한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있어 바로 타자이기 때문입니다. 레비나스의 멋진 표현을 한 구절 더 읽어보지요.
나의 존재에 대한 타자의 영향력은 신비스럽기만 하다. 그것은 미지의 것이라기보다는 인식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빛에 대해서도 저항적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암시되고 있는 바는, 타자가 나와 더불어 공동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자아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외재성이며 혹은 그의 타자성이다. 『시간과 타자』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졌기에, 나는 타자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가 모든 것, 심지어 빛마저도 흡수해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블랙홀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타자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면서도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신비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타자와의 강렬한 첫 만남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순간이 우리에게 ‘순수한 현재(pure present)’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타자와의 만남만이 우리에게 시간이란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제도 그제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시간에 불과합니다. 어제는 그제와 같고, 오늘 역시 어제와 같을 뿐이니까요.. 이런 생활 속에서 사실 시간이란 전혀 의미가 없는 것, 우리로부터 도망친 아름다운 새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란 시계 속을 똑같은 패턴으로 회전하는 시침이나 분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란 기본적으로 단절과 변화의 계기를 가리킵니다. 타자와 마주친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도망친 새가 다시 내 품으로 날아와 안기는 듯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나에게 ‘바로 지금’이라는 시간, 즉 순수한 현재가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누군가를 갈망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나는 이제 어제의 내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런 순수한 현재를 통해 나에게는 과거란 것이 생기게 되는 셈이지요. 그러나 순수한 현재는 나에게 이처럼 과거를 안겨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타자와 마주친 이 사건이 바로 우리에게 미래를 가져다준다는 점입니다. 나는 내일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도 있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일을 설렘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기다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나에게 미래라는 시간도 찾아오게 됩니다. 결국 타자와의 강렬한 첫 만남은 나에게 충만한 시간 전체를 다시 선물로 제공해주는 셈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레비나스가 타자와의 관계를 시간의 계기로 사유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은 미래이다. 미래의 외재성(초월성)은, 미래가 절대적으로 예기치 않게 닥쳐온다는 사실로 인해서 공간적 외재성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미래에 대한 기대, 미래의 투사는, 베르그손에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론이 마치 시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처럼 일반적으로 인식해왔지만, 사실 이것은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을 뿐 진정한 미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를 엄습하여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라는 관점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과 타자』
어느 순간 우리는 타자와 마주치고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 순간 우리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언젠가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지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내가 수영을 배우기 시작해서 엄청나게 노력한 끝에 수영을 능숙하게 하게 되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이제 나는 ‘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을 겁니다. 우리가 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이유는 내가 물의 흐름에 나 자신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타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물에 들어가 허우적거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순간 물에 자신을 맞출 수만 있다면 우리는 물에 뜰 수 있게 되겠지요.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타자의 삶에 자신을 맞출 수만 있다면 우리는 타자를 알 수 있게 되겠지요.
처음엔 누구나 ‘당신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지 나는 전혀 모르겠다’고 토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얼굴만 보아도 어느 정도 상대방의 기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불편함과 낯섦의 경험이 이처럼 편안함과 친숙함의 경험으로 변화되는 과정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타자와 만나서 사랑을 나눔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나로 변화하게 됩니다. 타자와 조우하기 이전의 나는 타자와 만나 그에게 자신을 맞춤으로써 질적으로 전혀 다른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타자와 마주친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달라질지 예측하거나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대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현재 자신의 생각을 미래에 투사한 것에 불과하겠지요. 그러나 레비나스의 말에 따른다면, 그것은 단지 ‘미래의 현재’일 뿐 ‘진정한 미래’는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즉 자신이 미래에 어떻게 생성될지 미리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마주친 타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까요. 이 때문에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야말로 ‘미래와의 관계’라고 이야기했던 겁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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