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편 / 특수
보편은 다수결의 결과일까
우리는 ‘보편타당’하다는 말을 사용한다. 이런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보편부당’한 것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이런 말은 반론의 여지가 있다. “보편이라는 말 자체가 여러 가지 상황에 잘 들어맞는 ‘최대 공통성’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보편은 타당이라는 뜻을 어차피 품고 있다”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즉 ‘보편타당’이라는 표현은 비슷한 의미의 두 단어가 중복된 강조 용법이라는 것이다. 어느 쪽 주장이 맞는 걸까?
철학에서 사용하는 ‘보편’이라는 용어는 ‘타당’의 뜻을 상당히 품고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논리를 따지는 데에 있어서 기본 또는 출발점으로 사용하는 토대를 ‘보편명제’라고 부른다. 이는 수학에서 ‘공리’라고 부르는 것들과 비슷하다. 수학에서는 논리의 가장 기본이 되지만 증명이 불가능한 것들, 그래서 그냥 합의에 의해 논리의 기본으로 삼는 것들을 ‘공리’라고 부른다. 보편명제나 공리는 ‘타당’을 품고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또 다르다. ‘중세 유럽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보편적이었다.’ 이런 표현에서는 타당하다는 뜻이 상당히 약화된다. 그 사회에서 공리처럼 사용되기는 했지만, 사실상 가장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은 부분이라는 의미 이상은 없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보편적이었다 하더라도 그 세계관에 입각한 십자군전쟁은 결코 타당하다고 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보통 쓰는 ‘좀 보편적으로 생각해라’라는 표현도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방식으로’ ‘적용 범위가 좀 넓은 방식으로’라는 의미 이상은 없다.
보편은 ‘여러 사람이 동의하는’이라는 의미를 분명히 포함한다. 그런데 이 의미만이 강조되면 그때는 ‘보편부당’한 경우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결국 여러 사람이 동의하는 바는 대부분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편의 타당성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쉽게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르다. 심한 경우에 ‘보편’이라는 말은, 다수가 소수를 강제하려고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까지 나타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머리를 일주일씩 안 감고, 이를 사흘씩 안 닦는 사람이 있다. 노숙자나 정상적인 생활을 포기한 사람의 경우가 아니다. 정상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 물론 혼자 살고, 집안에서 주로 작업을 하는 직업인 경우에 가능한 일이지만, 가끔 이런 사람이 있다. 머리 감는 것, 이 닦는 것은 세상이 정한 보편일 뿐 내 특수한 상황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매일 머리 감고, 이 닦아야 한다는 것은 샴푸 회사, 치약 회사에서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주장할 때, 이를 반박하는 것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
결국 보편이 보편으로 인정받으려면 단순히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여러 가지 특수한 상황에 적용해서 어긋나지 않는다는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수의 동의만을 중시하는 사람은 다수결의 결과가 바로 보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은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는 것처럼 느껴져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런데 그 반발이 다수결의 지나친 맹신에 대한 견제 수준을 넘어서면 다수의 지지라는 것 자체를 무시하게 되는 수가 있다. 다수가 꼭 옳지는 않다. 그러나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것은 옳을 가능성이 그만큼 더 높은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이라고 여기는 기준과 자신이 특수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낸 기준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보편이란 없다. 그런 건 다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며, 앞서 언급한 머리 안 감고 이 안 닦는 사람의 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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