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의사②
화가 난 갈레리우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별도로 서방 정제와 부제를 임명했다. 이제 권력투쟁은 불가피해졌다. 하지만 아직 열세라고 느낀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 머물면서 힘을 길렀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병사한 것은 그에게 신호탄이 되었다. 그 이듬해 로마 정복을 결심한 콘스탄티누스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예상을 뒤엎고 승리함으로써 실력으로 서방 정제의 자리를 차지했다. 뒤이어 324년에 그는 동방 정제인 리키니우스마저 죽이고 제위에 올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두 정치 이후 무려 40년 만의 단독 황제였다.
세력의 근거지를 서방에 두고 있던 콘스탄티누스였으나 그의 마음은 늘 동방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행정의 중심은 수백 년 동안이나 서방(로마 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경제와 문물의 중심은 동방이었던 것이다(더구나 그의 고향은 발칸의 나이수스였다). 그가 보기에 그간 로마가 수많은 어려움과 위기를 겪었던 이유는 정치적 중심과 경제적 중심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330년에 그는 로마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천도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새 수도는 동방에 있어야 하고 기존의 대도시가 아니어야 한다는 게 천도의 원칙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정된 새 수도는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인 옛 비잔티움의 터전에 건설되었으며,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지배 체제는 기본적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전제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게르만 용병 부대로 이루어진 친위대를 증강해 처음부터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행정제도에서는 추밀원을 새로 구성했다. 그전까지는 황제의 임명으로 구성되는 자문 기구가 있었으나 추밀원은 정부 각 부서의 장들이 참여하는 회의체였으므로 오늘날의 내각처럼 한층 발달한 관료 기구였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인플레이션을 잡는 게 급선무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유명무실해진 은화를 버리고 솔리두스라는 금화를 새로 만들었다. 현물 경제는 여전히 지속되었지만 솔리두스는 금화인 덕분에 통화 가치를 잃지 않았으므로 그런대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다.
▲ 콘스탄티누스의 노력 역사적 의의로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게 최고의 업적이겠지만, 그 밖에도 콘스탄티누스는 솔리두스라는 금화를 만들어 물가를 안정시켰고,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해 제국의 수도를 동유럽으로 옮겼다. 그러나 결국 그의 조치는 제국의 수명을 잠시 연장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왼쪽은 그의 시대에 제조된 금 펜던트이고 오른쪽은 콘스탄티누스의 흉상이다.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진왜란
연표: 임진왜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