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학문④
이렇게 전개된 스콜라 철학의 성과들을 집대성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다【앞서(146쪽의 주)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하여 그리스와 중국에서 각각 서양 사상과 동양 사상의 뿌리가 형성되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아퀴나스가 등장한 시기도 마치 우연이 아닌 것처럼 동양 사상의 발전 시기와 겹친다. 아퀴나스보다 약간 앞서는 시기에 중국 송나라(남송)에서는 주희(朱熹, 朱子, 1130~1200)가 그때까지의 유학을 집대성하여 성리학(주자학)을 체계화하고 사서(四書)를 유학의 기본 교과서로 확정했다. 아퀴나스가 그리스도교 철학의 새로운 단계를 이룬 인물로 평가되듯이, 주희 역시 유학이 발생한 이래 최대의 학문적 성과를 이룬 인물로 평가된다. 서양의 대표 사상인 그리스도교와 동양의 대표 사상인 유학이 거의 동시에 ‘재무장’을 이룬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의 방대한 저작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ne)』은 교부철학,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나아가 이슬람 철학과 유대 철학까지 총동원해 그때까지의 신학적·철학적 논의를 문제 제기와 쟁점 토론의 형식으로 총정리하고 있다. 토론 형식을 취한 것은 그가 당시 태동하던 대학(파리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학문을 집대성한 학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토마스의 사상도 다분히 절충적이다. 그전까지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이성과 신앙, 인간과 신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도 쟁점에 포함된다. 그는 이 난제들을 차근차근 풀어갔는데, 모든 것을 통합해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가 앞섰으니 아무래도 약간의 억지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자연의 진리(과학)와 초자연의 진리(신)는 서로 모순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신의 구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아직 신의 경지를 모두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지식을 계속 발전시켜야 하며 그것이 신의 은총을 이해하는 길이다.
종교를 근간으로 삼은 해결책이지만 어쨌든 토마스의 노력 덕분에 세속 학문의 길이 열렸다. 토마스는 기존의 신학을 계시신학으로, 자연에 관한 학문을 자연신학으로 분류했는데, 자연신학이 곧 신학에서 벗어난 학문의 영역이다. 이로써 중세 내내 신성의 영역에 완전히 짓눌려 있던 세속의 영역, 이성의 영역이 열리기 시작했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이성을 통해 신의 뜻을 알아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곧이어 닥쳐올 인간 이성의 해방, 즉 르네상스를 예고한다. 하지만 토마스의 시대에는 이미 세속 군주들이 교회의 품을 떠나고 있었으니, 사상이 현실을 이끌었는지 현실이 사상의 변화를 낳았는지 모를 일이다.
▲ 유럽의 주희 공교롭게도 13세기는 기원전 5세기에 이어 또 한 차례 동양과 서양에서 함께 학문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다. 중국에서 주희가 유학을 집대성하고 재해석했다면, 유럽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역할을 했다. 그림은 산타마리아노벨라 성당에 있는 작품인데, 한가운데 높이 앉은 인물이 아퀴나스다.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란
연표: 임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