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로마’가 만든 르네상스③
그렇게 보면 오늘날 전해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들 중 상당수는 원래 ‘순수 예술 작품’이 아니라 ‘실용적이고 상업적인 작품’이었던 셈이다. 당시에는 미술 시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있다 해도 미술가들을 먹여 살릴 만큼 크지 않았다. 오늘날처럼 미술가가 작품의 판매로 생활할 수 있으려면 9만 명의 피렌체 인구가 각 가정마다 작품을 하나씩은 구매해주어야 했을 것이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내적 동기에 의해서 작품 활동을 하기보다 주로 다른 사람의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그런 점에서 동양 미술이 발달한 과정은 사뭇 대조적이다. 동양에서도 관청에 속한 화원들은 왕이나 귀족의 명령을 받아 영정을 그렸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문인들이 여가 활동으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고, 또 그런 작품들이 후대에 명화로 남았다는 점에서 서양과는 다르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작품 판매의 의미가 아니라, 권력자가 예술가의 기능을 사주는 형식이었다. 당시의 권력자라면 단연 도시의 지배자인 군주였으나 교회도 그에 못지않은 최고의 주문자였다. 교회를 새로 지으면 건축가를 비롯해 제단화와 벽화를 그릴 화가, 조각상을 만들어줄 조각가 등이 필요했다. 교회는 말하자면 오늘날 영화 산업처럼 종합예술의 공간이었다. 교회의 의뢰를 받은 예술가는 그것을 생업 활동이자 자기 솜씨를 발휘해 명성을 드높일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중에서 보수도 최고이고 최고의 영예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교황청이 의뢰하는 경우였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라파엘로의 <아테네의 학당〉은 바로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명화다【그런 면에서 보면 르네상스 미술이 발전한 것은 서양 역사 특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해준다. 인구 대다수가 먹고살기 급급한 시대에 예술을 후원할 수 있는 계층은 귀족과 부자였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귀족과 부자가 있지만 그들이 언제나 예술과 문화의 창달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동양의 지배층은 늘 정치권력에 굶주려 있어 사회의 소프트웨어를 발달시키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시대는 더 나중이지만 서양의 근대 음악이 발달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바흐(Johanm Sebastian Bach, 1685~1750),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등 근대 음악의 창시자와 거장들은 모두 궁정 음악가로 일하면서 모시는 군주나 교회의 의뢰를 받아 음악들을 작곡했다. 이를테면 군주가 자식을 낳았을 때 작곡한 축가, 군주가 죽었을 때 작곡한 진혼가 들이 오늘날 ‘걸작’으로 남게 된 것이다(미술이나 음악에서 이른바 ‘순수한 예술적 동기’가 중요해지는 것은, 작품을 판매하는 것으로도 예술가가 먹고살 수 있게 되는 19세기부터의 일이다). 다만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한창일 무렵 미술에 비해 음악은 아직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음악의 르네상스’는 17세기 독일 지역에서 태동하게 된다.
▲ 예술 산업 흔히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을 구분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지금은 고전으로 전해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작품들도 당대에는 모두 상업 예술이었다. 르네상스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상업화의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부유층을 위해 그림에서와 같은 전문 화랑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란
연표: 임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