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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7부 열매② -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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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7부 열매② -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②

건방진방랑자 2022. 1. 30.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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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

 

 

프랑스 역시 영국처럼 아프리카를 영토화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중해 무역에 대한 프랑스의 욕심은 한 가지 기발한 발상을 낳았다. 1832년 이집트에 근무하던 프랑스 외교관 레스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있는 수에즈 운하를 구상했다. 20여 년 뒤 그는 외교관을 그만둔 다음 1858년 수에즈 운하 회사를 설립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작업에 들어가 마침내 1869년 운하를 완공하게 된다.

 

그와 비슷한 무렵 아프리카의 남쪽 끝에서 아프리카의 새로운 가치가 발견되었다. 대항해시대에 발견된 남아프리카 지역에는 17세기부터 네덜란드가 건설한 케이프 식민지가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은 종교 분쟁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이들을 보어(Boer)인이라 부르는데, 말하자면 이슬람이 북아프리카를 지배하기 시작한 8세기 이후 최초로 아프리카에 살기 시작한 백인들인 셈이다. 비록 네덜란드의 식민지이긴 했으나 이들은 농사를 짓고 살았으므로 본국과 지속적인 연관을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19세기 초 영국이 인도 무역을 위해 케이프 식민지를 접수하겠다고 나섰을 때 동포라는 의식이 별로 없었던 보어인들은 내륙으로 더 들어가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이라는 두 개의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

 

그러나 1870년대에 이곳은 갑자기 말 그대로 귀해졌다.’ 귀금속과 보석, 즉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것이다. 그렇잖아도 아프리카를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하던 영국은 즉각 케이프 식민지의 주둔 병력을 증강시켰다. 머잖아 원주민 백인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이리하여 발발한 보어 전쟁에서 보어인들은 1880년의 1차전에서는 그럭저럭 영국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1899년에 재개된 2차전에서 패배했다. 3년 뒤에는 보어인의 국가가 영국에 합병되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비빌 언덕을 잃은 네덜란드는 아프리카를 포기하고 동남아시아 식민지 경영에만 주력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구분 수에즈 운하가 건설된 결과 서유럽에서 인도까지 이르는 뱃길은 무려 1만 킬로미터 이상 단축되었고, 아라비아 상인들의 대상 무역이 위축되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지도상으로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그림은 18691117일 세계 각국의 국가 원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 장면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한국사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란

연표: 임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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