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목요일②
하지만 독주에는 제동이 걸리게 마련이다. 소비가 없다면 생산도 지속될 수 없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국 경제의 큰 문제는 과잉생산이라는 점이었다. 자본 과잉에다 생산 과잉, 세계 전체가 가난해졌는데 미국만이 부자라는 것은 결국 수요의 부족을 낳을 테고, 그 결과는 세계의 단독 자본가이자 생산자인 미국에 부메랑처럼 되돌아올 터였다. 그러나 그 문제점이 드러나는 과정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 너무도 순간적이었다.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가인 월스트리트에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주가가 사상 최대로 폭락했다. 사상 최초의 대공황이 시작된 이날은 목요일이었기에 ‘암흑의 목요일(Black Thursday)’이라고 부른다.
대공황의 물결은 몇 개월 만에 전 미국을 초토화시켰다. 직격탄을 맞은 금융업을 비롯해 돈줄이 끊겨버린 공업이 무너졌고, 심지어 농산물 가격의 폭락으로 농업도 공황의 파괴력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기업은 도산했고, 노동자는 실업자가 되었으며, 농민은 농사를 지을수록 손해만 보았다. 1933년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는 수요를 늘리는 것만이 공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탄생한 게 뉴딜정책(New Deal)이다.
국가가 잉여 농산물을 직접 구매해 농산물의 가격을 안정시키고, 실업자들을 댐 건설 같은 대규모 국책 사업에 고용한다. 또한 방대한 규모의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해 빈민들을 구제하는 한편 국가 지출을 증대시킨다. 이것이 뉴딜의 기본 내용이었는데, 골자는 과잉된 자본과 생산을 수요 증대로 상쇄하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정책은 공황 타개에 큰 효과를 발휘했으며, 이후 자유방임형 자본주의 대신 국가 개입형 자본주의로 궤도를 수정하는 큰 변화를 낳았다.
그러나 유럽은 미국과 사정이 달랐다. 대공황의 직접적 피해는 미국에 닥쳤으나 감기만 걸려도 중병으로 전화될 정도로 취약한 유럽의 경제는 대공황의 간접적 피해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다만 유럽은 진원지인 미국처럼 급격하게 붕괴를 맞이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1932년부터 유럽에 불어닥친 대공황의 충격파는 유럽 각국의 경제와 정치를 뒤흔들었다.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영국과 프랑스 정부에는 좌익 세력의 요구와 진출이 활발해졌다. 독일 좌익 세력의 ‘독특한’ 취향은 히틀러를 총리로 만들어주었지만.
뉴딜은 공황의 치료약은 되었으나 예방약은 되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국가가 가장 큰 경제 주체로 나섰고, 영국에서도 19세기 이래 유지되어온 자유무역주의 대신 다시 보호관세의 장벽이 세워졌으나, 수백 년 전 중상주의를 연상시키는 국가 개입형 자본주의는 공황을 낳은 과잉생산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과잉생산은 마치 체내에 쌓인 노폐물처럼 적절히 배설해주어야 했다. 이것이 곧이어 터져 나오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경제적 배경을 이룬다. 전쟁과 무기 산업만큼 대량으로 수요를 촉발해주는 것은 없으니까.
▲ 절망의 하루 요즘처럼 증권시장을 조작하기 위한 ‘작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자본과 생산의 과잉이 누적된 결과 어느 평범한 목요일 미국의 증권시장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진은 대공황이 발생한 날, 1929년 10월 24일 월스트리트의 모습이다. 하루 동안 이곳에서만도 11건의 자살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인용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란
연표: 임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