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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7부 열매② - 6장 최후의 국제전, 파시즘의 힘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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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서양사, 7부 열매② - 6장 최후의 국제전, 파시즘의 힘②

건방진방랑자 2022. 1. 30.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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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힘

 

 

프랑코는 단기전으로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믿었으나, 무력하고 불안하게만 보이던 인민전선 정부는 막상 위기에 처하자 예상외로 만만치 않았다. 사실 맨 먼저 쿠데타에 대응한 것은 인민전선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 들이었다. 이들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무기고와 총포점을 습격해 무장하고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군과 맞서 싸웠다. 이들의 활약으로 국내의 파시즘 세력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모로코에 주둔해 있는 프랑코의 반란군의 본산이었다.

 

해군이 반란군을 지지하지 않는 바람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던 프랑코에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비행기를 모로코로 보낸 것이다. 게다가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에 경제원조와 더불어 각각 1만과 7만 명의 지원 병력까지 파견했다. 여기에 포르투갈마저 반란군을 지지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병력 수송을 도왔다. 이들의 개입으로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개입한 이상 에스파냐 내전은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이 되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파시스트 반란군은 같은 색깔인 파시스트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반면 공화주의의 정부군은 다른 공화국들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처음부터 불간섭 정책을 취했고, 마침 에스파냐와 같은 시기에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선 프랑스도 처음에는 에스파냐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려다가 영국의 압력으로 불간섭을 선언했다. 유럽의 양대 중심이 이런 태도였으니 자연히 다른 나라들도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에스파냐 내전에 대해 유럽 각국의 정부는 불간섭으로 일관했으나 민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의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 영국의 조지 오웰 등 수많은 작가와 지식인, 노동자, 사회주의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에스파냐에 들어가 에스파냐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말로의 희망,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모두 이 참전 경험을 소설로 쓴 것이다). 3만 명이 넘은 것으로 추산되는 이들 의용군은 공식적인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s)으로 조직되기도 했다.

 

19368월 에스파냐 본토에 상륙한 프랑코군은 순식간에 에스파냐 전 지역을 손에 넣고 수도인 마드리드를 포위했다. 그러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는 정부군과 시민들의 항전이 만만치 않았고, 각 지방에서도 인민전선 정부와 연대한 세력들의 테러와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프랑코는 유리한 전황에서도 쉽사리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정부의 연대 관계가 복잡한 만큼 연대 세력의 성격도 다양했다. 예를 들어 북부의 바스크 같은 지방은 정부가 자치를 약속했기 때문에 정부 측으로 참전했고바스크는 에스파냐의 대표적인 이질적 지역이다.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는데, 토착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한다. 바스크족은 중세에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고 근대까지도 독특한 전통문화와 언어를 유지했다(바스크어는 헝가리어, 핀란드어와 더불어 유럽에서 인도 유럽어에 속하지 않는 드문 언어다). 도시화,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지금은 지방색이 상당히 퇴색했으나 여전히 바스크 분리주의가 남아 있다, 무정부주의 세력 중에는 꼭 공화국 정부를 지킨다기보다 혁명의 기회로 여기거나 프랑코에 반대하기 때문에 반란군과 싸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시민들은 쿠데타군에 포위된 가운데서도 2년 이상이나 버텼다. 그러나 장기전이 될수록 전황은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은 목표도 하나고 성격도 파시즘이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묶인 통일체를 내내 유지할 수 있었으나 공화국 측은 처음부터 구성 요소가 다양한 탓에 전쟁이 길어지면서 내분이 발생했다. 그나마 뒤처지는 전력을 어느 정도 보완해준 통일성에 균열이 생기자 공화국 정부는 무너지고 말았다. 19391월에 바르셀로나가 함락되고, 3월에는 마드리드마저 함락되면서, 결국 에스파냐 민중의 정부는 국제 파시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비로소 유럽의 공화국정부들은 이것이 곧 다가올 국제 파시즘의 위협을 예고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에스파냐 내전은 국제 파시즘 세력에게 파시즘의 정치적 실험장이자 신무기의 실험장이기도 했다. 1937426일 바스크의 게르니카라는 한적한 마을에 독일 공군 콘돌부대의 전폭기들이 사격 연습을 하듯 폭탄을 퍼부어 주민 2000명과 가축들이 몰사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물론 당시 바스크는 프랑코군의 공격 목표이기도 했으나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게르니카 폭격이 바로 독일이 개발한 신무기를 실험하는 차원에서 벌어졌다는 점이다.

 

당시 독일군 총사령관인 괴링은 개전 초부터 이 신무기 실험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조그만 마을에 각종 포탄과 소이탄, 심지어 어뢰까지 사용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곧이어 벌어질 수백만 유대인 학살의 예고편일까? 그래서 유럽의 이질적인 요소인 바스크족을 의도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닐까?

 

 

공화국을 사수하라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부를 제외하고 유럽 각국의 정부는 에스파냐 내전에 관여하기를 꺼렸으나, 유럽의 지식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인민정부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에 앞다투어 참가했다. 사진은 프랑코군에 맞서 싸우겠다고 선언하는 여성들의모습이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영화화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마리아(잉그리드 버그만)의 모델이 바로 이들이었을 것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한국사

연표: 선사~삼국시대

연표: 남북국 ~ 고려

연표: 조선 건국~임란

연표: 임란~조선 말기

연표: 대한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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