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여! 안녕: 하나님의 의(義)
바울에게 있어서 최소한 기독교복음이라는 것이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면 안 된다. 그것은 ‘기쁜소식’이 될 수 없다. 복음은 사람에게 ‘자유’(freedom)를 가져다 주는 것이어야 한다. 복음이란 구태의연한 율법체계에 인간을 복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이 ‘새롭게 태어남’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명제가 바울에게는 부활(Resurrection)의 궁극적 의미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여기 ‘의롭다’(righteous)함은 원래 유대교 전통에서, 물론 유대교 전통에서 자라난 바울의 의식 속에서, 정확하게 법정용어로 쓰인 말이었다. 법정에서 판결을 받을 때 피고인이 ‘무죄다’(innocent) ‘결백하다’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거짓이 아닌 참으로 판명되었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의롭다’(ṣādîq)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로마인서에도 ‘하나님의 의(義)’(the righteousness of God)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롬 1:17), 이 명사적 구문 때문에 우리는 의(義)가 마치 하나님 개체의 속성을 드러내는, 하나님 자신의 의로운 덕성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개인적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는 과정을 말한다. 즉 하나님의 법정에 설 때에 인간이 무죄판결이 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관계설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의롭게 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정에서 무죄판결이 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법을 어긴 적이 없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잘 지키면 법정에서 ‘의롭다’는 판결이 쉽게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유대인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율법의 행위’(works of the law)로써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죄판결이 날 수 없다고 일갈한다. ‘율법의 행위’라는 말의 ‘행위’ 속에는 ‘축적된 공로’라는 뜻이 들어가 있다.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단식을 하고, 유월절 등의 명절을 잘 지키는 그러한 율법지킴의 공로를 축적하는 행위로써, 그러한 덕성으로써 인간은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로움은 오로지 예수 안에서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해진다. 법조문을 쌓아놓고 그것을 피해 사는 것으로써만, 그러한 부정적 과정을 통해서 인간이 의롭게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로움은 그러한 법조문적 부정적 맥락을 뛰어넘는 긍정적 삶의 선택이며 발랄한 생명의 가능성의 발현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19)
율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함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간은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부활이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요, 인간의 의로움이요 자유다! 바울은 이로써 기독교를 율법의 종교인 유대교로부터 해방시켜 영적 자유의 종교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3:28~30)
이제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종교로서 점차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유대화파들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리고 애석한 일이지만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그들은 정치적 세력기반을 완전히 상실하였고 기독교 초대교회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바울이 유대화파의 논리에 무릎을 꿇었더라면 기독교는 아마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갔을지도 모른다. 쿰란과도 같은 몇몇 유적만을 남긴 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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