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사실로 강요하는 목사에게 송사도 가능한 현대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조선땅에는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는 천여 만의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있다. 그 중에는 성서의 축자무오류(逐字無誤謬)를 신봉하는 매우 보수적인 목사님도 계실 것이고 그 교설을 따르는 매우 우직한 신도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목사님은 설교하실 것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린 것은 사실이며 우리 삶의 역사의 지평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사실로 믿고 따르는 신도들! 그래서 감명을 받고 교회에 재산을 반이나 바쳤다. 그런데 그 신도의 사랑하던 외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과연 그 아들의 시체를 교회로 가져와서 이렇게 외치는 자가 있을까?
목사님이시여! 당신은 하느님의 권능을 부여받은 주님의 사도라 말했고, 당신은 당신 입으로 분명 송장이 일어나는 것은 거짓말 아닌 사실이라 말했소.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으로 인하여 썩은 냄새가 풀풀 나는 송장도 다시 살아나는 이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그래서 나는 성경을 믿었고 나의 재산도 바쳤나이다. 어서 내 아들을 살려내시오! 어서 내 아들을 불러일으키시오!
심지어 오늘날과 같이 송사가 자유로운 세상에서는 목사님을 사기죄로 고발하거나, 혹은 목사님의 ‘사실성’의 주장을 빌미로 변호사를 동원하여 연보환수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송사를 지방법원에 접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의 기독교가 제아무리 펀더멘탈리즘(fundamentalism)의 극치를 치달린다 해도 이러한 송사나 항변에 관한 보도를 접한 적이 없다. 방송국을 점령하고 무법적 행동을 자행하는 소수 교도들의 광포한 신앙상식에 비추어 논의하자면 이런 보도가 없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웬일인가? 우리는 무지한 듯이 보이는 일반신도들의 신앙체험의 깊이를 너무도 이해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나사로를 살리는 예수의 이적을 믿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그 나름대로 이미 불트만이 말하는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의 과정을 순간순간 체험 속에서 완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불트만의 신학보다는 그들의 믿음이 궁극적으로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불트만의 심오한 신학언어보다 더 심오한 실존적 의미를 그들은 막연하지만 신화적 기술로부터 체득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론이 아닌 본능이며, 사실여부와 무관한 언어적 동물의 상징적 기능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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