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증오가 아니다
종교는 항상 설명되는 순간 왜곡되고, 왜곡되는 순간 결국 야만으로 타락하고 만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는 야만 속에서 성장한다. 유럽의 지성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야만으로부터 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여 왔다. 종교는 계시와 신앙과 은총의 대상으로만 규정되어야 하며, 일상적 체험과 이성과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정밀한 신학체계를 수립하려는 끊임없는 이성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새카만 옛날에 이미 지중해연안의 한 불건전한 미신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문명통합의 기초(the common basis for the unity of civilization)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적 아이디어들은 서로 배우고 서로 빌려야 하며,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종교는 증오(Hatred)로 남아서는 아니 된다. 오늘 한국기독교의 배타성은 증오, 그 이상을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도 기독교 신학의 임무는 이 세계가 단순히 덧없는 사실 이상의 것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 있는 것 같다. 요한은 그래서 그노시스를 말했고 빛을 말하고 영을 말한 것이다. 그것은 결국 소멸해가는 우리 인생 속의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요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한 영원성의 확보만이 우리의 삶이 단순한 희노애락을 넘어서는 깊은 만족을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이러한 방식의 영원성의 확보가 과연 우리 삶의 의미의 유일한 방식인지에 관해서는 많은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는 그러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세계를 대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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