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와 반야에 대해
혜(慧, pañña)란 무엇인가? 혜는 반야(般若)라고 하는 것이다. 반야란 무엇인가? 그것은 앎이다. 이 세계와 이 우주, 그리고 인간의 모든 것에 관한 바른 통찰이다. 이미 지식과 지혜가 이분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내 이미 설진(說盡)하였다. 나는 참으로 아는 자치고 지혜롭지 못한 자를 보지 못했다. 알면서 지혜롭지 못한 자는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앎을 통하지 않는 지혜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체험도 앎이다.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앎이 아니요, 혀로 아는 것도 앎이요, 귀로 아는 것도 앎이요, 코로 아는 것도 앎이요, 피부의 느낌으로 아는 것도 앎이요, 눈으로 직접 보는 것도 앎이다. 그런데 어찌 앎을 통하지 않고서 지혜롭다함이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아는 것인가? 바로 연기의 실상을 아는 것이다. 싯달타가 말하는 반야란 바로 연기의 실상을 아는 지혜를 말한 것이다.
학교에 가서 수학을 배우고, 화학을 배우고, 물리를 배우고, 생물을 배우고, 철학을 배우고, 예술을 배우고, 역사를 배우는…… 이 모든 것이 연기를 알아 지혜를 얻고자 함이다. 이런 것들에서 생활의 예지를 얻지 못한다면 어찌 이것이 학문으로서 가치를 지닐 수 있겠는가? 학승과 선승이 따로 있는 이 개탄스러운 우리나라 승가의 풍토에서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식이라 하는 것은 모두 사이언스요, 사이언스란 그노시스요, 지혜인 것이다. 사이언스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세계의 인과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 뚜글라카바드의 주인, 기야스웃딘의 묘로 가는 길, 이 서기어린 길은 뚜글라카바드와 직접 통한다. 그 밑은 거대한 호수였다고 한다. 이 묘는 그 또라이 아들 무하마드 뚜글라크가 지었는데, 향후 이슬람 묘의 조형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나는 후대 무굴제국의 화려한 묘들보다 이 기야스웃딘의 묘의 단아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발 밑에는 죄수들을 죽음으로 빠뜨리는 구멍이 있었다. 인간의 심미적 감성과 잔혹한 야성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건물의 돔이 소박한 반구(半球) 형태인데 이것이 후대에 가면서 전기다마 처럼 생긴 전구(全球) 형태로 바뀌어 간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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