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나투스
다음으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보겠습니다. 윤리학은 스피노자에게 독특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스피노자에게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어떻게 작동해서 어떻게 대상을 파악하고, 어떻게 오류를 범하고, 어떻게 감정을 갖거나 감정에 매이게 되고, 어떻게 욕망이라는 것이 생겨나는지, 나아가서 그 욕망을 어떻게 해야 하고,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려고 합니다. 이런 관심을 다루는 것이 ‘윤리학’인 거지요. 스피노자는 이것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책 제목이 『에티카』( ‘윤리학’이란 뜻입니다)인 것을 보면 이는 상당히 설득력을 갖습니다. 사실 스피노자의 문제설정에서는 근대철학의 꽃이었던 인식론이 따로 독립되어 있다고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스피노자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급진적인 사람이었고, 그래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근본적인 형태로 주장하는 급진적인 정치철학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신학-정치학 논고』), 그가 윤리학을 중심으로 사고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가 정치철학, 인간의 삶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윤리학에서 스피노자의 기본 사상을 요약하자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지며 이 양자는 서로 합일적(통일적)이라는 것입니다. 육체는 라틴어로 코르푸스(corpus), 영혼은 멘스(mens)라고 합니다. 앞의 말은 영어나 불어에서 육체ㆍ신체를 뜻하는 corps의 어원이고, 뒤의 말은 mentalㆍmentality(mentalité)처럼 정신ㆍ영혼과 관련된 말의 어원이지요. 알튀세르는 mens란 말은 영혼이나 정신으로 흔히 번역되지만 그런 식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corpus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힘’(fortitudo)이라고 합니다(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실제로 『에티카』를 보면 육체와 정신을 모두 힘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 ‘힘’을 가장 중요한 원리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표현’이라는 말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실체가 자신을 양태들로 표현한다고 할 때, ‘표현한다’는 말은 여기선 활동한다. 산출한다는 뜻입니다(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스피노자가 윤리학을 연구하는 기본원리는 육체는 정신과 합일적이다 라는 명제입니다. 즉 육체와 정신의 결합체로서 인간에게는 양자를 합일(통일)시키려는 코나투스(conatus)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상태를 ‘지속하려는 힘’이라고 합니다. 이 힘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실체의 양태인 모든 것들, 즉 모든 개체들에 다 있다고 합니다. 예컨대 멈춰 있던 것을 계속 멈춘 상태에 두려고 하는 것, 운동하는 것을 계속 운동하려는 상태에 두려고 하는 것 ― ‘관성’이 이런 힘의 대표적인 것이지요 ― 을 일러 코나투스라고 합니다【국역본에서는 ‘노력’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강영계 역, 『에티카』, 서광사), 이는 의식적인 활동이란 의미가 강하게 포함되어 있어서 적당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관성’처럼 의식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어떤 ‘힘’을 가리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육체와 영혼을 일치(합일) 시키려는 힘이, 즉 코나투스가 있다고 합니다. 도식적인 예를 빌리면, 제가 넥타이를 매고 강단에 섰을 때와 운동화를 신고 공을 하나 들고 운동장에 서 있을 때의 정신적 힘(mens)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시에 출근해 공장에서 기계에 맞춰 일을 하는 사람과 유치원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의 멘탈리티 역시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정신적 힘은 육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에 맞추어 변하며, 반대로 정신적 상태에 따라 육체가 맞춰 변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와 정신을 합일시키고 일치시키는 무의식적인 힘이 바로 ‘코나투스’지요.
이 코나투스가 정신과 관련되면 ‘의지’라고 불리고, 육체와 정신에 동시에 관련되면 ‘욕망’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예컨대 빠삐용처럼 갇힌 상태를 벗어나려는 강렬하고 끝없는 ‘의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의지는 육체를 움직여냅니다. 계속 잡히고, 잡히는 횟수가 늘 때마다 고통과 신체구속은 더해 가는데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지요. ‘욕망’이라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성욕, 식욕이지요. 이는 일단 육체를 어떤 상태로 지속시키려는 욕구인데, 이러한 육체의 욕구에 따라서 정신적으로 성욕이나 식욕을 채우려는 힘이 발생하지요. 이처럼 육체와 정신을 합일시키려는 힘(코나투스)을 중심으로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문제를 연구합니다(이러한 코나투스 개념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기회란 개념을 서양철학의 언어로 이해하는 데 가장 근사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영국 화가 베이컨(Francis Bacon, 1909~92)의 「조지 다이어의 세 연구」(Three Sulies of George Dyer)라는 작품이다. 베이컨은 언제나 이처럼 사람의 모습을 정육점에 매달린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린다. 얼굴은 뭉개지고, 눈ㆍ코ㆍ입은 뒤섞인다. 모든 기관은 자신의 정해진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것과 혼합된다. 이렇게 뭉개고 섞는 작업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이 고르게 섞인 하나의 알[卵]이 되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모두 그 알을 거쳐서 나왔다. 수정란, 거기에는 어떤 기관도 없다. 그것의 표면은 어떤 자극이 어떤 강렬도로 새겨지는가에 따라 다르게 변용되며 다른 기관이 된다. 손과 발, 눈과 코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표면은 어떨까? 손은 수저와 접속하면 밥을 뜨지만, 펜과 접속하면 글을 쓰고, 운전대와 접속하면 자동차를 본다. 그것은 근육과 피부에 다른 힘과 에너지의 분포를, 다른 강렬도의 분포를 통해서 그렇게 다른 일을 하는 다른 ‘양태’, 다른 ‘기계’가 된다. 식사-기계와 글쓰는-기계, 운전-기계, 여기에 대체 공통된 하나의 본질이 있을까? 정해진 본질이 없으며, 어떤 것(양태)도 될 수 있는 잠재적 상태, 그것이 바로 베이컨의 알-신체고, 스피노자의 알-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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