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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2부, 3. 버클리 :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2부, 3. 버클리 :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건방진방랑자 2022. 3. 2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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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버클리 :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로크에 대한 두 가지 비판

 

 

버클리는 로크 비판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입론을 세웁니다. 그의 로크 비판은 일단 두 가지로 나누어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실체의 개념에 대한 비판입니다. 로크는 모든 복합관념은 오성(정신)이 결합한 것이고 명목적인 것일 뿐이라고 하면서, ‘실체에 대해서만은 예외로 한다고 합니다. 즉 물질과 정신이라는 실체는 예외적으로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버클리는 이런 예외조항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둘째, ‘1성질에 관한 비판입니다. 로크는 대상의 성질이란 모두 인식주체가 경험한 것이요 주관적이라고 하면서, 오직 제1성질만은 예외로 둡니다. 그러나 버클리는 제1성질만 유독 물질 그 자체에 속하는 객관적 성질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그가 보기엔 경험되지 않는 성질이란 알 수 없는 성질이요, 알 수 없는 성질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말처럼 앞뒤가 안 맞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비판을 통해 버클리가 도달한 곳은 근대철학의 밑바닥입니다. 물질적 실체를 가정하면, 이것이 지식과 일치하는가라는, 확인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이는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다루면서 이미 확인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물질적 실체’, 물질이란 개념을 없애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버클리는 말합니다.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지각된 것뿐이다.” 이제 내 책상은 내가 연구실 문을 닫고 나서는 순간 존재했던 것’(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지각하지 않기 때문에.

 

버클리가 이토록 과감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과학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주교였다는 사실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물질을 부정하자마자 과학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 로크로 하여금 예외들을 만들게 했던 것인데, 버클리는 과학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런 예외를 두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문제가 생겨납니다. 예컨대 누군가가 버클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부인은 지금 안 보이는데(지각되지 않는데), 그럼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멀쩡한 마누라를 죽었다고 할 수야 있겠습니까? 생각 끝에 버클리가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지각해 주시고 있기 때문에 우리 집사람은 존재하고 있다오.” 정말 주교다운 대답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지각하고 계시다면 네스 호의 괴물도, 무시무시한 공룡도, 아담과 이브가 놀던 파라다이스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이름붙일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데아라는 보편자 역시 하느님이 계신데 존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유명론은 자신의 반대물(실재론)로 바뀌고 마는 것입니다.

 

 

 

 

관념론으로

 

 

다른 한편 버클리는 물질이란 실체를 제거하지만, 정신에 대해선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각하는 정신이 없다면 대체 경험이 어떻게 가능하겠으며, 지각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따라서 버클리에게는 정신이란 실체만 존재하며, 이 실체가 지각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정신이란 실체 앞에서 버클리는 유명론에 일종의 유보조항을 달아두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가 비판했던 로크처럼 말입니다.

 

요약하자면, 버클리의 주장은 유명론에서 관념론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세의 유명론은 실재론에 대항하는, 반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흔히 유명론을 중세의 유물론이라고도 하지요. 로크의 유명론 역시 이런 성격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데카르트 철학의 관념론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 딜레마에 처했다고 해도 말입니다.

 

반면 버클리에 와서 유명론은 정반대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그는 로크가 남겨두었던 물질이란 실체를 제거합니다. 사실상 이는 개체의 실재성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유명론이 보편 개념의 실재성을 부정하지만, 개체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하면 버클리의 이 작업은 양면성을 갖는 셈입니다. 유명론의 주장처럼 모든 보편 개념이 이름일 뿐이라면,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할 때 그 실재성역시 보편 개념이므로 이름일 뿐인 것으로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선 유명론의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유명론이 본래 개체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면, 그래서 신학에 대항하는 적극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면, 개체의 실재성을 제거하는 버클리의 주장은 유명론의 부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식의 부정을 거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한다’, ‘지각한다는 말조차 보편성을 갖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는 버클리 자신이 정신이란 실체를 예외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거꾸로 확인됩니다. 이는 유명론과 근대철학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곤란을 드러내는 방식의 하나일 것입니다.

 

어쨌든 버클리는 물질이란 개념을 제거함으로써 정신과 그 정신이 지각한 것만을 세상에 남겨두었고, 그 결과 유명론은 관념론으로 전환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근대적 문제설정안에서 유명론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려면 어쩔 수 없이 거쳐야만 하는 불가피한 행로였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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