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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1부, 2. 스피노자 :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1부, 2. 스피노자 :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

건방진방랑자 2022. 3. 2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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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피노자 : 근대 너머의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근대철학을 통틀어서 가장 독특하고 변종 같은 철학을 세웠습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을 연구했고,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나름의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대부분의 근대철학자가 데카르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비판의 근본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게 바로 데카르트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스피노자였음은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특징, 나아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이 갖는 중요한 특징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 대해 다소 상세하게 얘기하는 것은 그런대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셈입니다.

 

스피노자의 문제의식은 명시적으로 데카르트의 철학이 갖는 중요한 전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 두 철학자 간의 상호관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일단 여기서는 데카르트의 중요한 전제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을 보면서 시작하기로 합시다. 이를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봅시다.

 

첫째는 존재론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됩니다. 앞서 말했듯이, 데카르트는 신에게서 사고와 행동의 중심인 주체를 떼어내는데, 그로 말미암아 주체는 불가피하게 대상세계와도 분리되게 됩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주체라고 할 때, 그것은 적극적ㆍ능동적인 것이고, 자연의 다른 생물과는 다르게 사고하는 힘이 있으며, 그걸 이용해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갖고 있음을 뜻합니다. 반면 대상인 자연세계는 조용히 주체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게 됩니다.

 

이제 신을 대신해서 주체라는 이름표를 단 인간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자연은 이 주체가 정복하고 지배하며 이용해야 할 세계가 됩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여기에 필요한 정보를 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은 반자연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 목소리를 키워가고 있는 환경주의자나 생태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데카르트야말로 자연을 이토록 파괴한 원흉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와 자신의 경계를 정하는 지점 중 하나는 바로 이곳입니다. 그가 보기에 자연은 단지 수동적인, 그래서 지배되어야만 하는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데카르트적인 관점에 대비해서 스피노자는 자연 자체가 수동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능동적이고 활기있는 것임을 주장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이것이 스피노자가 설정한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둘째로는 주체와 분리된 대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과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서 과학주의가 등장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문제는 스피노자에게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는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실체는 오직 하나만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개념이나 지식은 실제 대상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양자가 일치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한마디로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양자가 일치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양자는 단일한 실체의 속성이어서 애초부터 일치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또한 어떤 판단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알려면 진리를 미리 갖고 있어야 한다는 역설까지 지적합니다.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라는 것이지요.

 

셋째로 윤리학에 관한 것입니다. 데카르트에게나 스피노자에게나 윤리학이란 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 그 범위가 훨씬 넓습니다. 단지 도덕에 대한 사고만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지요. 알다시피 데카르트가 보기에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데 육체가 그것이지요 이 때문에 인간은 결코 이성적이지만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데카르트로서는 인간의 이러한 성격을 이성에 의해 억제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그의 도덕론의 원칙이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데카르트의 윤리학은 정확하게 계몽주의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는 요소를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특징 역시 스피노자로선 경계선을 긋는 또 하나의 지점입니다. 그는 감정이나 욕망, 정념 등을 이성에 의해 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은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연과 다른 어떠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임을 분명히 합니다(이러한 자연주의는 앞서 말했던 존재론에서부터 일관됩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계몽주의적인 윤리학과는 애초부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게 이를 좀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르네상스기 독일의 대표적 화가 뒤러(Albrecht Dürer)자화상이다. 인간의 자화상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기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그림에 서명하는 것조차 피조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한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을, 그것도 이렇게 정면에서 그린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자만의 징표라고 비난받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뒤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치 예수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을 교묘하게 겹쳐놓은 듯이 그렸다. 흔한 사이비 종교 교주들처럼 자신을 재림 예수라고 착각했던 것일까?(실제로 그는 정확히 12명의 제자를 데리고 있었다.) 아니면 인간에 내재하는 신성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마도 후자가 더 정확할 것이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또한 인간의 얼굴에 성모의 얼굴을 겹쳐 그려 놓지 않았던가!

이처럼 사람의 모습을 이상적인 형상으로 그리는 것은 르네상스 미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신성한 존재로서 인간발견의 징표라고 말한다. 그럴 것이다. 휴머니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니. 그러나 특별한 존재로서 인간을 발견하는 것에는, 인간 아닌 것에 가해진 특별한 억압이 수반되었다는 점 또한 잊어선 안 된다. 인간중심주의에 따르면, 저 희고 숭고한 얼굴과 달리 검고 흉한얼굴을 가진 들로 하여금 인간을 위해 일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자연주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실체’(substantia)양태’(modus)라는 두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실체란 개념에 대해선 앞서 말씀 드린 바 있지요. 물론 사상가마다 그 개념에 부여하는 내용에 차이는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둡시다.

 

실체와 양태에 대해 다시 한번 터미네이터 2란 영화를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 자유자재로 변하는 터미네이터 T-1000이란 친구를 전체 세계라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실체는 터미네이터로서 수행할 임무가 그것인데, 이 친구가 숱하게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거꾸로 그러한 바꿈(변화)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즉 그가 그처럼 수없이 모습을 바꾸는 것은 오직 터미네이터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지요. 물론 영화에선 이 임무를 미래의 컴퓨터가 입력한 것이지만, 일단 이 T-1000이란 친구를 전체로 가정하면 터미네이터란 임무는 변화의 원인이며, 그 변화에 의존하지 않는 요인입니다. 또 그것은 무한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무한한 특징을 갖습니다. 이래서 무한자라고 하지요.

 

한편 이런 변화들을 스피노자는 변용’(modification, 변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변화된 모습 각각을 일컬어 양태라고 합니다. 예컨대 때에 따라선 경찰관, 때에 따라선 어머니로 변하는 그 모습 각각을 일러 양태라고 하는 겁니다. 이는 다른 것(타자)에 의존합니다. 예컨대 잡음없이 검문을 통과해야 할 때는 경찰관의 모습을 취했다가, 주인공을 유인해 잡아내려고 할 때는 그의 어머니 모습을 취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각각의 양태’(경찰관, 어머니)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좀더 근본적으로는 실체에 의존하고 있는 겁니다.

 

실체
(substantia)
터미네이터로 수행할 임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우주를 포괄하고 변화의 원인임 자기원인ㆍ신
변용
(modification)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변화들    
양태
(modus)
변화된 모습 다른 것(타자ㆍ실체)에 의존함  

<실체는 양태로 표현된다 = 실체는 양태로 존재한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자연 혹은 우주를 변화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우주 전체를 포괄하고 있으며, 그것의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바로 실체입니다. 이 실체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기에, 다른 것들을 원인으로 갖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바로 자기 자신의 원인입니다.

 

이래서 자기 원인이라고 하지요. 이걸 스피노자는 이라고 부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체, 신은 바로 자연(우주) 밖에서 그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 안에 있는, 모든 변화의 원인을 가리킵니다. 이건 자연 자체를 뜻하지요. 이런 뜻에서 자연은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스피노자의 이란 개념은 종교적인 절대자가 아니라 바로 자연 안에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요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흔히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다른 한편 자연은 변화하는 각각의 개체들로 이루어집니다. 예컨대 태어나고 늙어가는 인간에서 흐르는 물과 변화하는 계절에 이르기까지 극히 다양하고 가변적인 것들의 집합이 바로 자연이지요. 이처럼 변화하는 개체들 각각을 일러 양태라고 한 셈인데, 이런 뜻에서 자연은 양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실체는 양태로 표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스피노자에게 이 표현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데, 여기서는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실체는 양태로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et la probléme de l‘expression), 다시 말해 양태는 실체가 변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경찰관이든 어머니의 모습이든, 간호사의 모습이든 복도바닥의 모습이든 어떤 모습을 갖지 않고는 T-1000이란 친구가 존재할 수 없음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때론 손이 칼로 되기도 하고 몽둥이로 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로서 양태라고 할 수 있지요.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은 이처럼 양태로서 존재합니다. 실체의 변용된 모습인 양태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개체의 본질은 양태다라고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 양태들, 이 개체들 전체를 싸안고 있으며, 그것들 전체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바로 실체인 거지요. 따라서 스피노자가 보기엔 실체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체를 자연에 돌려주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는 라이프니츠와 상반됩니다. 라이프니츠는 개체의 본질은 실체라고 합니다. 모든 개체 각각이 그 내부에 고유한 힘을 가지며, 개체 각각이 실체라는 거죠. 개체 각각에 존재하는 실체를 라이프니츠는 단자’(monad) 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모든 개체가 곧 실체인 데 반해, 스피노자의 경우에는 개체란 실체의 변형된 모습이고 양태입니다. 실체는 이 양태의 근저에서 이 모든 양태들을 모두 싸안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하나임에 반해 라이프니츠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실체이기에, 실체는 무한히 많이 있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자기원인이라고, 즉 그 자체의 원인에 의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실체는 자연 안에 있는 무언가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힘을 가리킬 따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 안의 생산적인 힘, 그것이 바로 실체지요. 자연은 이 생산적인 힘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치
개체의 본질은 양태다 개체의 본질은 실체다
개체는 실체의 변형된 모습으로 실체는 하나다 모든 것이 다 실체이기에 실체는 무한히 많다

 

 

따라서 자연은 그 외부에 있는 어떤 무엇에 의해 창조된 게 아니라 자연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신이 자연을 창조했다는 견해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셈입니다. 덕분에 거듭 쫓겨나서 고생을 해야 했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힘이란 뜻에서 그는 자연을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 ‘능산적 자연이라고 흔히 번역합니다)이라고 합니다.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자연이라는 뜻이지요. 동시에 자연이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체들, 양태라고 부르는 것들의 집합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은 당연히 양태들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데, 양태는 아까도 얘기했듯이 실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수동적인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그는 또 자연을 산출되는 자연’(natura naturata, ‘소산적 자연이라고 흔히 번역합니다)이라고 합니다.

 

결국 산출하는 자연산출되는 자연이란, 자연이 갖고 있는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측면과 수동적이고 산출물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자연이면서 동시에 만들어가는 자연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이란 능동적인 힘과 수동적인 힘의 결합체라는 말입니다.

 

자연에 공존하는 이 두 가지 상반되는 힘을 통해 스피노자는 자연을 생성으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요컨대 인간이나 자연이나 하등 구별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은 이런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관점은 자연이, 주체가 하는 대로 통제되고 내맡겨진 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의 관점은 자연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대상이며 과학으로 무장한 인간에 의해 지배될 대상이라고 보는 근대적인 반자연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며, 오히려 들뢰즈가 자연주의라고 부를 수 있었던 그런 관점이기도 합니다. 이는 또한 데카르트가 자연에서 주체를 떼어내면서 함께 떼어냈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을 다시 자연에 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연의 두 가지 속성
산출하는 자연
natura naturans
산출되는 자연
natura naturata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자연 수동적이고 산출물적인 자연
生成(자연주의: 자연의 주체성ㆍ능동성 강조)

 

 

 

 

스피노자의 진리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스피노자의 논의는 실체’ ‘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됩니다. 그는 데카르트처럼 두 개의 실체를 가정하면 독립적인 두 개의 실체가 서로 일치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연장’, 혹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것을 실체의 속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실체는 많은 속성을 가지는데, 그 중에 연장사유는 인간이 알고 있는 두 가지 속성이라는 겁니다.

 

잠시 여기서 사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고 하는 점에 주목합시다. 스피노자가 이라고 불렀던 실체는 기독교적 관념과는 달리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사유와 연장을 모두 갖고 있는 물질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신이란 영원하고 완전한, 그래서 오직 말씀으로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공간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연장을 가지고 있는 자연 그 자체인 것입니다.

 

실체는 이 속성들을 통해서 표현된다고 합니다. 아까 실체가 양태로 표현된다는 말은 실체가 양태로 존재한다는 말이었죠. 여기서 실체가 속성들로 표현된다는 말은 실체가 속성을 통해서 인식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이 두 가지 속성 모두 실체가 갖는 본질을 표현하기에 그것을 통해 우리는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겁니다(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Spinoza et la probléme de l‘expression). 이렇게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부닥쳤던 일치의 문제를 피해 갑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정신과 육체, 사유와 연장이 일치하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않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 그리고 에덴에서의 추방

이 그림은 헤르조그 폰 베리(Herzog von Berry)의 기도서 아주 풍요로운 시대(Les très riches heures)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인간은 신이 빚은 피조물이란다. 저기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인류의 조상이란다. 신은 인간뿐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뱀도, 사과나무도, 풀도, 대지와 하늘도, 고딕 스타일의 예배당도, 심지어 시간도 모두 만들었단다. 그렇다면 그 신은 누가 만들었을까? 하늘도, 대지도, 어떤 자연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 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에덴 동산에서 저렇게 아담과 이브를 꾸짖고 있는 저 신은 대체 에덴 동산 안에 있는 것일까, 밖에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그는 자연 안에 있는 것일까, 밖에 있는 것일까? 밖에 있다면, 그는 대체 어떻게 아담과 이브의 행동을 보고 꾸짖을 수 있었을까? 안에 있다면 그는 자연의 일부, 우주의 일부라는 말 아닌가? 어떻게 그는 자신이 만든 것 안에 있을 수 있었을까?

스피노자는 이런 난감한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한다. 신이 자신이 만든 것과 다르다면, 그는 거꾸로 자신이 만든 것에 의해 규정된다(‘자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만 자신을 규정한다는 실체()의 정의에 어긋난다. 따라서 신은 자연의 바깥에 있지 않다. 신이란 자연 안에서 자연의 무한한 생성과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이고(능산적 자연), 각기 그때마다 만들어진 자연이다(소산적 자연).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반지름이 5인 원이 있다고 합시다. 이 원의 실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선 이 원의 면적은 25π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이 원의 둘레의 길이는 10π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둘 다 그 원의 가장 중요한 속성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동일한 원의 본질을 다른 속성(면적/길이)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 두 명제는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속성(차원)의 것인만큼 동일할 수 없으며, 결코 동일해서도 안 됩니다. 같다면 두 개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같다면 그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속성이 될 리도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이 두 명제는 동일하지 않은, 서로 다른 명제인 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또한 분명한 건 그 두 명제가 하나의 동일한 원이걸 실체라고 비유했지요 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두 명제는 동일한 실체를 다른 측면, 다른 차원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는 면적이라는 속성에서, 또 하나는 길이라는 측면에서 원을 파악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 양자는 분명히 서로 다른 명제이지만, 그것만큼이나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셈입니다. 즉 그 양자가 동일한 것을 표현하는 것인 한 그 본질에서는 당연히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데카르트를 당혹케 한 곤란한 문제가 스피노자에게는 아예 발생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은 이런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연장이라는 측면에서 본 개(현실적인 개)와 사유라는 측면에서 본 개(‘라는 개념), 아까 원의 면적과 길이에서 보았듯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개는 짖지만 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자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양자는 근본에서는 서로 일치합니다. 개라는 동물에 결합되어 있는 질서와 라는 개념에 요약되어 있는 질서는 일치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즉 양자 모두 동일한 실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스피노자가 진리란 당연히 도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극히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얼굴, 몇 개의 기계들로 조립 구성물

롬왈드 하주메(Romuald Hazoumé)의 작품으로 왼쪽은 제니럴 뒨 주르(General D’um jour), 오른쪽은 그리스인(Le Grec)이다. 2000년 광주 비엔날레에시 본 것 기운데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쓰레기장을 뒤져 찾아낸 플라스틱 통과 모자, 다리미 등이 저렇게 멀쩡히 인간의 얼굴을 한 조각품이 되었다. 아프리카 조각을 닮은 더 훌륭한 작품도 있었는데, 도판을 구할 수 없어서 안타깝다. 작가의 유머 감각도 탁월하지만, 작품을 구성한 발상은 더욱 놀랍다. 인간의 얼굴, 그것은 몇 개의 기계들로 조립된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휴미니스트들이 떠올리는 그 숭고한 얼굴이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낸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미인들의 휴머니즘에 대한 아프리카인의 풍자일까? 아니면 쓰레기로 버려진 것들조가 인간과 다르지 않은 존귀함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일까?(사진 제공,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도공(Dogon)족의 조각

굳이 삐딱하게 보는 것보단, 여기서 보이듯이 차라리 숲에 굴러다니는 나무조각으로 동물의 형상과 섞인 사람의 얼굴을 만드는 아프리카인의 전통을 떠올리는 게 더 좋을 듯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인간에게 시만 신의 형상을 보는 기독교적 휴머니즘과는 달리, 동물이나 나무토막, 버려진 쓰레기에서조차 존귀한 의 형상을 보는 아프리카인의 사유를 보는 듯해서 기쁘다. 혹은 적어도 인간과 물소, 나무와 쓰레기에서 등가성을 보는 사유를 여기서 스피노자의 위대한 자연주의를 발견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것은 자연이란 인간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그러니 잘 보존하자는 식의 인간중심적 자연주의보다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기계, 생물과 무생물의 모든 대립을 넘어서 모든 것을 의 일부(양태)라고 보는 태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무한히 소급되는 보증인의 문제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예컨대 반지름 5인 원의 면적을 ‘25π’. 혹은 ‘27π라고 상이하게 판단했을 때, 즉 하나의 속성에 대해 상이한 판단이 있을 때, 어떤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피해갈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와 단련해 유명한 명제가 있는데, 그는 에티카2부에서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라는 정리를 제출합니다. 비유하자면 빛이 빛과 어두움의 기준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빛과 어두움은 빛이 있다’ ‘없다라는 식으로 구별되지, 빛과 어두움 외부에 있는 제3자에 의해 구별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이 있다’ / ‘없다역시 존재가 부재함으로써 정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와 무의 기준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리가 진리 자체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약간 우회하여 생각해 봅시다. 앞에서 거울 얘기를 했었지요? 여러분이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 그걸 자기 얼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그때 하나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게 내 얼굴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판단을 하려면 이미(!) 내 얼굴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존 레논은 위대한 예술가다라는 판단을 하려면 이미 위대한 예술가가 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즉 훌륭한 음악가란 어떤 사람이라는 기준을 미리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저 창 밖에 있는 나무를 보고 포플러 나무라고 말하려면, 그리고 그게 참인지 아닌지 알려면 무엇이 포플러 나무인지 이미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진리는 대상을 인식해서 얻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따라서 진리라는 기준이 이미 먼저 있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진리를 보증하는 문제가 당장 발생합니다.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예를 들어 여러 개의 돌 가운데 진짜 보석을 가려내야 한다고 합시다. “여섯번째 것이 진짜 다이아몬드고 나머지는 가짜다라고 제가 말했다고 합시다. 그 판단이 참인지 거짓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얼마든지 틀릴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보석감정사를 데려왔다고 합시다. 제가 골라낸 것을 보고 그가 이건 유리조각이군이라고 했다 합시다. 그럼 제 말은 거짓임이 판명나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의를 제기할 겁니다. “당신 말을 어떻게 믿느냐? 가짜 보석감정사가 아니란 보장이 있느냐?”, 그럼 그 사람은 자기를 보증해 줄 사람(보석감정사 자격증을 발행한 사람)을 보증인으로 내세우겠지요. 그러나 그 보증인이 가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럼 그 보증인은 또 다른 보증인을 내세워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보증인의 보증인이 정말 보석을 확실하게 가려낸다는 것 역시 또 다른 보증인을 필요로 합니다. 정말 확실한 보증인을 마련하기 위해선 이처럼 무한히 소급되어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스피노자는 이것처럼 허망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끝이 없기 때문이지요.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이같은 무한소급을 멈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을 끌어들인다고 스피노자는 여기서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슬쩍 드러냅니다 비판합니다. 게다가 무한소급을 따라 이렇게 거슬러 올라갈 때조차도 이게 다이아몬드인지 유리인지를 판단하려면 이미 어떤 게 다이아몬드고 어떤 게 유리인지 진리의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래지어

오페라 섹스트로닉으로 백남준과 함께 외설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는 첼리스트 사를로트 무어만, 그녀와 백남준의 유명한 퍼포먼스 살아 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래지어의 한 순간이다. 여기서 첼리스트는 특별한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혹은 움직이는 조각이고, 그 조각은 가슴을 가리기 위해 TV를 브래지어로 착용하고 있다. “내가 브래지어를 입고 있다내지 인간이 기계를 사용한다는 식의 관념과 정반대로 백남준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가로지르면서 전체를 기계적 조립물로, 하나의 아상블라주(assemblage)로 만든다. 하지만 인간은 특권적인 존재, 다른 모든 것을 사용하는 존재고 지배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사람에게, 이 스피노자주의적 발상은 얼마나 당혹스런 것일는지(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당혹해 하지 않았다면 못 알아본 것이다!), 인간도, TV, 첼로도, 혹은 나무토막도 모두 양태들일 뿐이다. 인간 내지 가연과의 대립에서 벗어나서 일반화된 의미의 저 기계, 그것은 이웃한 것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지는 스피노자의 양태와 정확하게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백남준은 TV와 기계들로 첼로를 만들기도 하고, 자기 자신의 몸으로 첼로를 만들기도 한다. 현과 활, 첼리스트와 적절하게 접속된 공명통, 그것이면 첼로를 정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진리와 공리

 

 

이는 사실 과학의 역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뉴턴 시대에 누가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가 빨라지면 그 질량이 늘어난다고 말했다면 그 말은 거짓이요, 그 사람은 물리학의 ABC도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될 겁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는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진리속도가 빨라지면 질량이 늘어난다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된 겁니다. 상대성이론이 새로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라면 사정은 정반대가 되겠지요.

 

요컨대 사유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데카르트적인 문제, 즉 근대철학의 중심이 되는 문제를 애초부터 피해 갑니다. 그런 문제는 스피노자에게서는 제기조차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근대적인 문제설정과 큰 거리를 두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그는 역설적으로, 인식을 통해 진리에 이르려는 근대적인 주체에게 그건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출발점임을 가르쳐 줍니다. 즉 인식에 이르려면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어떤 인식도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과 비교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에티카의 각 부()정의공리에서 출발하는 것은, 단지 기하학적 형식을 유추해서 쓴 거라기보다는 자기가 참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음을 인정하는 형식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결국 이런 점에서 그는 근대철학이 시작되자마자 거기서 벗어난, 근대철학 최초의 반항자요 근대 최초의 탈근대적철학자였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TV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백남준은 빈번하게 TV 안에 가부좌를 튼 부처의 상을 집어넣는다. 혹은 이 작품처럼 상품과 상품화된 삶이 끊임없이 배어나오는 화면에 낯선 배경을 가진 부처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TV가 불법(佛法)과 같은 다른 종류의 삶을 가르치는 기계일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부처마저도 TV 속에 박제가 되어 갇힌 이 험한 세상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어쨌든 이 작품 TV 부처는 조주(趙州) 선사(禪師)의 유명한 화두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의 대답, “없다.” 아래로는 개미에서 위로는 부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 스님은 왜 개에겐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약간 장난을 해보자. 어떤 스님이 남준 스님에게 물었다. “TV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남준 스님의 대답, “있다.” (이런! TV에도 불성이 있다고?) 다시 스님이 물었다. “언제 성불합니까?” 남준 스님의 대답, “하늘이 땅 위에 내려앉을 때 성불한다.” “하늘은 언제 땅 위에 내려앉습니까?” TV가 성불할 때 내려앉는다.”

 

 

코나투스

 

 

다음으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보겠습니다. 윤리학은 스피노자에게 독특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스피노자에게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어떻게 작동해서 어떻게 대상을 파악하고, 어떻게 오류를 범하고, 어떻게 감정을 갖거나 감정에 매이게 되고, 어떻게 욕망이라는 것이 생겨나는지, 나아가서 그 욕망을 어떻게 해야 하고, 욕망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려고 합니다. 이런 관심을 다루는 것이 윤리학인 거지요. 스피노자는 이것을 가장 중요한 주제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책 제목이 에티카( ‘윤리학이란 뜻입니다)인 것을 보면 이는 상당히 설득력을 갖습니다. 사실 스피노자의 문제설정에서는 근대철학의 꽃이었던 인식론이 따로 독립되어 있다고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스피노자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급진적인 사람이었고, 그래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근본적인 형태로 주장하는 급진적인 정치철학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신학-정치학 논고), 그가 윤리학을 중심으로 사고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가 정치철학, 인간의 삶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윤리학에서 스피노자의 기본 사상을 요약하자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지며 이 양자는 서로 합일적(통일적)이라는 것입니다. 육체는 라틴어로 코르푸스(corpus), 영혼은 멘스(mens)라고 합니다. 앞의 말은 영어나 불어에서 육체ㆍ신체를 뜻하는 corps의 어원이고, 뒤의 말은 mentalmentality(mentalité)처럼 정신ㆍ영혼과 관련된 말의 어원이지요. 알튀세르는 mens란 말은 영혼이나 정신으로 흔히 번역되지만 그런 식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corpus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fortitudo)이라고 합니다(알튀세르, 맑스를 위하여).

 

실제로 에티카를 보면 육체와 정신을 모두 힘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을 가장 중요한 원리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표현이라는 말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실체가 자신을 양태들로 표현한다고 할 때, ‘표현한다는 말은 여기선 활동한다. 산출한다는 뜻입니다(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스피노자가 윤리학을 연구하는 기본원리는 육체는 정신과 합일적이다 라는 명제입니다. 즉 육체와 정신의 결합체로서 인간에게는 양자를 합일(통일)시키려는 코나투스(conatus)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상태를 지속하려는 힘이라고 합니다. 이 힘은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실체의 양태인 모든 것들, 즉 모든 개체들에 다 있다고 합니다. 예컨대 멈춰 있던 것을 계속 멈춘 상태에 두려고 하는 것, 운동하는 것을 계속 운동하려는 상태에 두려고 하는 것 관성이 이런 힘의 대표적인 것이지요 을 일러 코나투스라고 합니다국역본에서는 노력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강영계 역, 에티카, 서광사), 이는 의식적인 활동이란 의미가 강하게 포함되어 있어서 적당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관성처럼 의식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어떤 을 가리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육체와 영혼을 일치(합일) 시키려는 힘이, 즉 코나투스가 있다고 합니다. 도식적인 예를 빌리면, 제가 넥타이를 매고 강단에 섰을 때와 운동화를 신고 공을 하나 들고 운동장에 서 있을 때의 정신적 힘(mens)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시에 출근해 공장에서 기계에 맞춰 일을 하는 사람과 유치원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의 멘탈리티 역시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정신적 힘은 육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에 맞추어 변하며, 반대로 정신적 상태에 따라 육체가 맞춰 변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와 정신을 합일시키고 일치시키는 무의식적인 힘이 바로 코나투스지요.

 

이 코나투스가 정신과 관련되면 의지라고 불리고, 육체와 정신에 동시에 관련되면 욕망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예컨대 빠삐용처럼 갇힌 상태를 벗어나려는 강렬하고 끝없는 의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의지는 육체를 움직여냅니다. 계속 잡히고, 잡히는 횟수가 늘 때마다 고통과 신체구속은 더해 가는데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지요. ‘욕망이라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성욕, 식욕이지요. 이는 일단 육체를 어떤 상태로 지속시키려는 욕구인데, 이러한 육체의 욕구에 따라서 정신적으로 성욕이나 식욕을 채우려는 힘이 발생하지요. 이처럼 육체와 정신을 합일시키려는 힘(코나투스)을 중심으로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문제를 연구합니다(이러한 코나투스 개념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기회란 개념을 서양철학의 언어로 이해하는 데 가장 근사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영국 화가 베이컨(Francis Bacon, 1909~92)조지 다이어의 세 연구(Three Sulies of George Dyer)라는 작품이다. 베이컨은 언제나 이처럼 사람의 모습을 정육점에 매달린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린다. 얼굴은 뭉개지고, 눈ㆍ코ㆍ입은 뒤섞인다. 모든 기관은 자신의 정해진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것과 혼합된다. 이렇게 뭉개고 섞는 작업을 극한으로 밀어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이 고르게 섞인 하나의 알[]이 되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모두 그 알을 거쳐서 나왔다. 수정란, 거기에는 어떤 기관도 없다. 그것의 표면은 어떤 자극이 어떤 강렬도로 새겨지는가에 따라 다르게 변용되며 다른 기관이 된다. 손과 발, 눈과 코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표면은 어떨까? 손은 수저와 접속하면 밥을 뜨지만, 펜과 접속하면 글을 쓰고, 운전대와 접속하면 자동차를 본다. 그것은 근육과 피부에 다른 힘과 에너지의 분포를, 다른 강렬도의 분포를 통해서 그렇게 다른 일을 하는 다른 양태’, 다른 기계가 된다. 식사-기계와 글쓰는-기계, 운전-기계, 여기에 대체 공통된 하나의 본질이 있을까? 정해진 본질이 없으며, 어떤 것(양태)도 될 수 있는 잠재적 상태, 그것이 바로 베이컨의 알-신체고, 스피노자의 알-실체다.

 

 

무의식의 윤리학

 

 

따라서 데카르트라면 당연히 이성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이 욕망이 스피노자에겐 바로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게 됩니다. 육체와 정신을 합일시키려는 힘으로서 코나투스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셈이니 말입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처럼 그것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억제하거나 통제하려는 것은 어쩌면 소용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프로이트라면 이 점에 관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얘기를 하고 있지요.

 

한편 스피노자는 이 욕망이라는 것이 타자에 의존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욕망 역시 하나의 양태로서 타자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한양태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유한하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한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양태들 각각은 모두 유한한 양태(유한양태)입니다. 어떤 개체가 취하는 모습(양태)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것에 의존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제 식으로 해석하면, 인간의 욕망은 다른 인간과의 특정한 관계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이처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은 인간의 욕망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처럼 이성에 의해 욕망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를 바꿈으로써, 욕망을 만들어내는 조건을 바꿈으로써 욕망 자체를 전환시키는 게 훨씬 더 현실적으로 중요한 게 됩니다. 인간 간의 관계를 바꿈으로써 욕망 자체를 바꾸려고 해야지, 욕망을 억누르려고 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윤리학적 계몽주의와는 전혀 상반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의미를 종합해 볼 때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란 일종의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거는 정신-육체의 합일 속에서 파악된 새로운 무의식 개념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서, 제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생체무의식이리고 하고 싶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꿈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에 따르면 내가 꿈을 꾼다는 것은 내 의식과는 무관하게 내 육체와 정신의 상태 속에서 나오는 것이고, 내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안에서 작동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이후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건 대개 다 알고 계실 겁니다. 이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무의식 개념에 의해 인간의 행동과 정서, 욕망과 정신 등을 사고하려 했던 결코 근대적이지 않은 사고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응도, 군상

이응노는 후기에 이처럼 하나의 흐름을 이루는 인간들의 군상을 주로 그렸다. 종종 대중(mass)이라는 말로 불리는 이런 군상은 어떤 때는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 집합체에서 벗어나는 흐름을, 그리하여 다른 집합체로 변환되는 흐름을 이루기도 한다. 무리[]지어 사는[] 이 모든 것을 중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학교는 가족이든, 문학이든 철학이든, 모든 개체들은 둘 이상의 대중들로 만들어진 집합적 구성물이다. 그래서 독신자 같은 개인조차도 항상 이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군상이고 중생이다.

이는 생물학적으로도 그렇다. 내 몸은 10조 개의 세포들로 이루어진 집합적 구성물이고, 시시각각 태어나고 죽으며 변하는 중생들의 집합체다. 스피노자는 모든 개체를 이러한 집합체로, ‘중생으로 본다. 따라서 개인과 집단, 개체와 집합체 간의 대립은 스피노자의 사상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제공, ()가나아트 갤러리

 

 

스피노자의 탈근대적 이탈

 

 

이상에서 본 것처럼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철학적 사고를 시작했지만, 데카르트가 열었던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명시적으로 보여주었던, 그리고 과학에 대한 신뢰 뒷편에 자리잡고 있던 근대적인 반자연주의에 대해 스피노자는 명확하게 반대의 깃발을 내건 셈입니다. 또한 주체를 대상에서 분리해내며, 주체를 사고와 판단의 중심으로, 나아가 세계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했던 주체철학적인문제설정에서 애시당초 벗어난다는 것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럼으로써 주체-객체(대상)의 일치라는 문제 자체가 스피노자에겐 제기되지 않으며, 나아가 인식이 진리를 제공하리라는 근대철학적 신념과 달리 차라리 진리가 인식에 앞서, 판단에 앞서 존재해야 한다는 역설을 지적함으로써 근대적 인식론에서 완전히 이탈합니다.

 

나아가 인간의 육체적 힘과 정신적 힘을 통일시키는 코나투스란 개념을 통해, 그리하여 의식으로 파악되지 않는 무의식적 힘을 통해 인간의 삶과 욕망 등 윤리학의 문제를 파악합니다. 이런 독특한 방식은 란 곧 생각하는 나’, 즉 의식과 동일시되는 를 뜻하던 데카르트의 사고와는 매우 다른 것이며, 이후 보겠지만 근대적 사고 전반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에 비한다면, 스피노자가 욕망이나 정념에 대한 통제를 뜻하는 윤리학적 계몽주의와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근대철학이 낳은 근대철학 최초의 이탈자요 반항자인 셈입니다. 즉 스피노자는 근대 최초의 탈근대인이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특징은 이후 다른 근대철학자들의 사상을 살펴보면 더욱 두드러지게 보일 것입니다.

 

이후 스피노자가 근대철학의 중심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독창적이고 탁월한 사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대철학자들로부터 이른바 죽은 개취급을 당합니다. 그의 철학이 갖는 탈근대적 성격을 생각해 볼 때, 더구나 그게 근대철학의 독립이 성취된 직후의 일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네그리의 말마따나 스피노자는 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하나의 변종’(anomalie)이었던 것입니다(네그리, 야성적 변종L‘Anomalie sauvage).

 

물론 나중에 스피노자주의자임을 자처하고 나선 사람들이 있어서 스피노자가 다시 철학의 중심으로 진입하기는 합니다. 그건 특히 셀링이나 헤겔에 의해 그렇게 되는데, 이를 위해 스피노자의 철학은 근대적인 형태로 전환되고 자신이 가장 반대했던 목적론으로 바뀌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예컨대 실체와 속성이란 개념은 주체/객체의 동일성을 입증하는 개념적 수단이 되고, 실체와 양태는 절대정신과 그것의 외화(소외)라는 개념으로 변형됩니다(이에 대해선 헤겔을 다루면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결국 스피노자가 근대철학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자신이 처음부터 분명히 벗어났던 근대적 철학으로 변형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입니다. 반면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 속에서 등장한 탈근대적 철학자들이 스피노자에게서 그 중요한 자원을 발견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오히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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