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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2부, 1. 유명론과 경험주의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 제2부, 1. 유명론과 경험주의

건방진방랑자 2022. 3. 24.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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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유명론과 경험주의: 근대철학의 동요와 위기

 

1. 유명론과 경험주의

 

 

실재론과 유명론

 

 

근대철학의 다음 장은 경험주의라고 불리는 철학적 흐름입니다. 이는 주로 영국에서 발달했고, 지금까지도 영국의 미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식주체의 경험이 지식의 연원이자 진리의 근거라는 것입니다.

 

철학사에서 이런 경험주의의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사람은 아시다시피 베이컨과 로크, 버클리와 흠입니다. 그러나 경험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으로 경험주의 사상가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베이컨은 흔히 알고 있는 이 사상가들의 반열에 오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러셀조차도 베이컨은 자신이 과학에 대해 그토록 강조했으나 사실은 당시의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과학적 지식도 갖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반면 리바이어던(Leviathan)으로 유명한 정치사상가 홉스는 오히려 이런 철학적 전통을 만들어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는 유명론’(nominalism)이라고 불리는, 경험주의의 모태와 관계된 것입니다.

 

여기서 경험주의의 주장을 단순히 요약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경험주의를 이전의 철학적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고, 그것이 데카르트가 세운 근대철학적 문제설정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검토하는 게 유용할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경험주의 철학을 유명론과 근대철학의 긴장 관계 속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유명론(唯名論)은 영어로 nominalism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nom은 이름이란 뜻입니다. 이름을 뜻하는 라틴어 nomen/nominis에서 나온 말인데, 영어에서 명사를 가리키는 noun이나 이름이란 뜻의 프랑스어 nom이 이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nominal명목적인이란 의미고요. 그래서 nomialism명목론’(名目論) 혹은 유명론이라고 번역하지요.

 

유명론이란 한마디로 말해 오직 이름일 뿐이란 뜻입니다. 무엇이 오직 이름일 뿐인가? 중요한 건 바로 이것인데, ‘보편적인 것’(the general)은 오직 이름뿐이란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란 말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 인간이 아닌 분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군요.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는 백 명 남짓의 인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중 저도 인간이고, 저기 있는 저분도 인간이고, 저 뒤에 있는 저분들 역시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강의실에 인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매우 어리석은 질문 같습니다만, 철학자들은 대개 이런 어리석어 보이고 당연해 보이는 문제를 갖고 붙들고 늘어지거나 때론 논쟁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특히 중세의 수도원에서 연구하던 중세 신학자나 철학자들에겐 말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부류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인간이란 존재는 없다. 다만 김xx라는 개인, xx라는 개인, xx라는 개인들만 있을 뿐이다. ‘인간이란 그 개인들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반대로 말합니다. “여기 있는 모든 개인이 바로 인간 아닌가? 그렇다면 이 자리에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인간이라는 보편자(보편적인 것)는 분명히 존재한다.”

 

여기서 전자는 보편적인 것(예컨대 인간’)은 오직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유명론이라 하고, 후자는 보편이 실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실재론’(realism)이라고 합니다. 이들 두 입장은 중세 후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나는데, 나중에 중세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의 하나가 됩니다(주의할 것은 근대에 와서 물질이 실재한다는 주장 역시 유물론 혹은 실재론이라고 불리는데, 이것과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주장이 왜 문제가 되는가? 여기서 잠시 상상력을 동원해 봅시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 프랑스에 어떤 미련스럽게 우직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중세철학의 가장 큰 논쟁인 실재론과 유명론 간의 논쟁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지요. 그는 보편이란 게 실재한다는 실재론자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했어요. 그래서 그것을 예증하려고 했지요. 그래서 그는 악마를 찾아내려고 마음을 먹었어요. 일단 어디 가야 찾을 수 있는지 알아야겠어서 도시의 수도원을 찾아가 신부들에게 물었지요. 악마는 대체 어디 있느냐고, 또 어떻게 생겼느냐고, 그걸 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말입니다.

 

수도사는 두 부류가 있었다더군요. 진지하게 자기가 본 악마의 모습을 설명해주면서, 그걸 잡으려면 손바닥에 꼭 맞는 검은 십자가와 마늘 두 쪽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주던 사람이 그 한 부류를 대표했지요. 다른 한 부류는 그건 하늘나라에 있으니 당신이 찾을 순 없을 거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나 우직한 철학자는 악마가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악을 설명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실제로 악마를 찾아나섰다더군요. 음습한 늪지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한없이 깊은 동굴을 찾아다니기도 했으나 결국 악마를 찾지 못했다는 거예요. 늙어서 힘도 빠진데다 굶주림에 지친 그는 어느 한 마을의 부잣집을 찾아갔지요.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할 때까지 좀 먹고 쉬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집 주인은 늙고 병든 걸인이라 생각해서 물을 끼얹으면서 내쫓았다더군요. 그때 그는 발견했던 겁니다. 바로 악마의 모습을 급하게 검은 십자가와 마늘 두 쪽을 꺼내들고는 악마를 향해 저주의 주문을 외웠지요. 그러나 그의 눈앞에는 굳게 닫혀진 대문만 있었을 뿐이었지요. 동네를 돌며 떠들고 다녔지만, 그 집 주인이 악마라는 말을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그는 젖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그 마을의 수도원을 찾았지요. 다행히 수도원에서 쫓겨나진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는 수도원에서 밤에 화장실을 가다가 어떤 수녀를 능욕하는 악마의 모습을 보았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때는 십자가와 마늘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소리를 질렀다더군요. ‘악마다!’라고, 모든 사람들이 한밤 중에 뛰쳐나왔지요. 그러나 그것은 악마가 아니라 어여쁜 수녀와 데이트를 하던 바람난 신부였던 거예요. 그 당시 이런 일은 수도원에선 흔히 있는 일이었으나, 공개되면 창피를 당할까봐 수도원은 새로이 악마를 보내어 그를 달래더라고 하더군요. 많은 돈을 주면서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악마를 수도원장이라고 부르더라는 거예요.

 

결국 그는 크게 깨닫고 악마 찾는 일을 중단한 채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지요. 악마는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입니다. 악마라고 불리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여러 개인들 속에 존재하는 공통된 특징을 묶어서 가리키는 이름임을 깨달았던 거지요. 그래서 그는 그 뒤 유명한 유명론자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 결과 교회에서 파문당하고 말았지만, 그것이 그의 신념을 꺾어놓진 못했다고 해요.

 

 

 

 

스콜라철학의 탄생

 

 

이렇듯 보편 개념은 단지 이름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유명론이고,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고 보는 것이 실재론입니다. 그 이견의 뿌리는 고대철학까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실재론적 입장은 플라톤 이래 주된 흐름이 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가 실재하고, 인간의 지식이란 그 이데아 세계에 대한 기억이며, 따라서 진리란 그 기억을 되살려 이데아의 세계에 다시 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데아라는 보편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며, 모든 보편 개념은 이데아의 세계에 근거하고 있기에 역시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지요. 이런 점에서 플라톤은 강력한 실재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반면 유명론은 이름에 걸맞는 입장이 분명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플라톤의 강한 실재론에 대해 의문이란 형태로 그 단서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의문을 요약하여 다시 제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포르피리오스(Porphyrios)인데, 이 사람은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노스(Plotinos)의 제자입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나 종()에 대해서 과연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지, 나아가서 이것이 존재한다면 정신적인 것인지 물질적인 것인지, 또는 감각적인 사물과 별개의 것인지, 아니면 감각적인 존재에 부수적인 것인지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이것은 굉장히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데, 나는 문제 제기만 하고 정리는 못하겠다

와인버그, 중세철학사, 민음사, 1985에서 재인용

 

 

포르피리오스의 이 책은 보에티우스(Boethius)의 번역본을 통해 중세 사회에 알려지는데(이것이 그 이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거기서 보에티우스는 보편자가 더 한층 현실적이라고 보는 입장을 실재론이라고 하고, 반대로 개별자만이 현실적이고 보편자란 우리의 지적 능력 속에만 존재하는 명목적인 것이라고 보는 입장을 유명론이라고 합니다.

 

중세철학은 앞서 말했듯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특히 중반기까지 그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지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이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한 것이었고, 이데아 자리에 신의 개념을 대신 갖다놓은 것임도 앞서 말했지요. 그러니 중세철학의 전반기를 지배한 것은 플라톤 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실재론이 지배적인 경향이었습니다. 사실 신학적 사고방식 속에서는 유명론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극단적인 경우, 자칫 신이란 존재를 오직 이름뿐인 것으로 간주할 위험마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 성장함에 따라 플라톤식의 논리를 빌린 신학으로는 점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자연에 대한 관찰이나 지식을 성서의 내용과 신학체계 안에서 새로이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 필요하게 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에 힘을 준 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었습니다. 거기서는 플라톤과 달리 이데아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물 속에 들어 있다(형상)고 합니다. 이런 사고를 빌려 스콜라철학이 탄생하게 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지요. 여하튼 이런 새로운 조류가 만들어지면서 보편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훗날 유명론으로 이어집니다.

 

 

 

 

보편 논쟁

 

 

보편논쟁이라 불리는 논쟁을 통해서 유명론은 비로소 자기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 논쟁은 짐작하다시피, 실재론자와 유명론자들이 싸운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실재론자들에 해당되는데, (보편자)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며, 개별자들은 신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죽으면 다시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라틴어로 universalis ante res, 보편이 앞선다”(“보편이 먼저다”)라고 말합니다. 에우리게나, 안셀무스, 기욤 드 샹포라는 사람이 대표적인 실재론자이지요.

 

안셀무스는 신의 본체론적인 증명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신은 완전한 존재. 존재라는 속성이 없다면 그건 불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존재는 존재를 속성으로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존재인 신은 존재를 속성으로 갖는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고 논증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신을 증명하는 것을 본체론적 증명’(ontological proof 혹은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완전한 존재라는 개념정의에서 신의 존재를 끄집어낼 정도로 강한 실재론자였습니다.

 

기욤은 좀더 극단적입니다. 그에 따르면 보편적인 실재인 인간다움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이 개개의 실재에 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다움을 생각하지 않고 신이 어떻게 사람을 창조할 수 있었겠느냐는 거지요.

 

반대로 유명론자들은 매우 소수의 사람들로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는 무엇보다 교회 입장에서는 유명론을 허용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universalis post res, 보편이 뒤따른다”(“보편이 나중이다”)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우선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아벨라르두스(Abaelardus)를 들 수 있습니다.

 

로스켈리누스는 유명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다가 매우 고생한 사람입니다. 그에 따르면 예컨대 흰 것’(보편)이 있다고 하는 것은 흰 박스나 흰 테이블 같은 개개의 개체가 있는 것이지, 흰 박스나 흰 테이블 등과는 별도로 흰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까진 그럭저럭 좋았지요. 하지만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이런 견해를 신과 삼위일체에까지 적용합니다. 그는 신이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세 가지 신적 존재 성부와 성자와 성신 의 결합인데, 사실은 이 세 가지 신적 존재의 공통된 특징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신이란 이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니, 중세에, 그것도 수도원에서 이런 주장을 하고도 살아남으려면 목이 몇 개 있어도 모자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신이란 이름일 뿐이고, 실상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란 세 명의 신이 있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중세에 이런 이야기를 했으니 교황청에서 가만 있었겠습니까? 그 뒤에 감금되고 쫓겨나고 도망다니고……. 그래도 즉각 화형당하지 않은 건 정말 신의 은총이었을 겁니다. 그 이후 유명론은 오랫동안 크게 대두하지 못합니다.

 

아벨라르 두스 역시 유명한 유명론잡니다. 그는 엘로이즈와의 연애 사건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죠. 엘로이즈는 파리의 한 주교의 조카딸인데 그는 이 여자를 유혹해서 도주했다가, 그 여자 집안의 무사들에게 잡혀 손목을 잘리우고 수도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죽었지요. 낭만적인 프랑스인들은 그가 죽은 지 700년이 지나고 나서 엘로이즈와 그를 합장해 주었다고 합니다.

 

아벨라르두스는 원래 실재론자인 기욤과 유명론자인 로스켈리누스 모두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두 주장의 강점과 약점을 다 알게 되었고, 따라서 두 가지 모두를 넘어설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기욤과 로스켈리누스 모두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기욤 말처럼 인간다움이 실재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로스켈리누스처럼 인간다움이란 없다는 주장도 지나친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면서 쓰는 인간다움이란 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universalis in rebus, 보편은 개별 속에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보편자는 어떤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라 개념일 뿐이며, 개별적인 사물이 갖는 특이한 요인을 생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그것은 어떤 사물이 아니라, 생략과 추상에 의해 성립된 개념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분명 유명론자에 속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보편논쟁유명론자들을 억압함으로써 종식되었습니다. 실재론자가 승리한 것인데, 당시로선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이 논쟁에서 제기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억압되고 은폐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논쟁이나 문제가 억압한다고 없어지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쟁은 뒤에 가서 다시 나타납니다.

 

중세 후기에 유명론과 관련해 새로운 주장들이 다시 나타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오컴(William of Ockham)이 두 개의 대비되는 입장을 대표합니다. 유명론과 관계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중용적 실재론이라고도 불립니다. 반면 오컴은 유명론의 입장을 명확하게 했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 대한 번역 및 주석의 대가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의 제자입니다. 이 사람은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체계에 입각해서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사실은 아퀴나스가 이 사람보다 훨씬 탁월했습니다. 말 그대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이었죠. 그래서 그 선생조차 교회의 빛이라는 말로 제자를 존중해 줄 정도였습니다.

 

 

고딕성당과 스콜라철학

그림은 비올레--(Viollet-le-Duc)이 그린 7개의 탑을 가진 대성당

중세철학의 꽃은 통상 토마스 아퀴나스신학대전으로 집약된 스콜라철학이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적으로 채색하여, 신이 창조한 우주의 모든 것을 해석하려 했던 이 거대한 시도를 통해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선 이해하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남겼다. 그 시기 중세 문화의 또 다른 꽃은 고딕성당이었다. 건축과 조각, 스테인드글라스 등 모든 예술적ㆍ문화적 능력이 집약된 성당은 당시 글을 읽지 못했던 대부분의 대중들에게 신적인 세계를 알려주기 위해 만든 일종의 이었다. 글자 없는 책. 그래서 혹자는 고딕성당을 돌로 쓴 스콜라철학이라고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살펴보라. 중세철학이 한눈에 들어올 것이다.

 

 

스콜라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현실과 자연 속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퀴나스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아까 이야기했던 안셀무스의 본체론적인 증명을 비판합니다. 그것은 개념적인 상태의 증명일 뿐, 신을 실제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증명한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아퀴나스는 다섯 가지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부동(不動)의 동자(動者)’(움직이지 않는 운동자)를 이용한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예컨대 여러분이 존재하려면 여러분들의 부모가 있고, 또 그 위에 부모(여러분의 조부모)가 있고……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운동하고 존재하는 사물들, 개체들은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낸 것 역시 또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다른 것을 만들어낸 원인이지만 스스로는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있어야 한다.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지만,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이 최초의 원인이 바로 신이다.

 

 

결국 부동의 동자란 바로 창조주란 말이지요. 이 창조주가 내린 은총의 빛, 즉 신의 빛이 인간의 이성을 완성한다고 말하며, 이성적 진리와 종교적 진리는 신으로 귀착되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신의 진리가 중요해지고, 신의 진리를 이성이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철학자들의 과업이 됩니다. 이제 믿기 위해선 이해하라!”는 슬로건이 나오며, 철학은 이런 과업에 봉사할 임무, 신학의 시녀라는 임무를 공식적으로 부여받게 됩니다. 이것이 스콜라철학의 기본 모토지요(이런 식으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입각해 신과 자연세계를 통일시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신학과 철학, 이성적인 세계와 신적인 세계, 신학적인 멘탈리티와 철학적인 멘탈리티의 통일이야말로 스콜라철학의 기초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형상과 질료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으로 자연계를 설명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라는 개념을 잠깐 살펴 봅시다. 예를 들어 이 나무탁자의 질료는 나무입니다. 질료는 재료가 되는 소재, 이러한 것을 뜻하지요. 그러나 나무만 가지고는 탁자가 되지 않습니다. 나무가 탁자가 되려면 설계도로 요약될 수 있는 형상이 있어야 합니다. 넓은 판대기와 네 개의 발, 그리고 몇 개의 버팀목이 있을 때 그것은 탁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질료가 없으면 그것 역시 탁자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형상과 질료(재료)인 나무가 있어야 나무탁자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질료와 형상이 결합해서 사물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을 아퀴나스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재료, 그리고 신이 만들어준 구조ㆍ형상 같은 것들이 모든 개체에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유명론과 실재론에 대해 이른바 중용적 실재론이라는 입장에 서는 것도 이와 연관돼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보편적인 것은 형상으로서 개별 내부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 탁자, 저 탁자 모두에 공통된 형상이 포함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도 인간이란 형상이 있고, 강의하는 제게도 인간이란 형상이 있듯이 말입니다. 즉 개별적인 모든 사물 내부에 보편자의 그림, 형상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퀴나스는 보편자가 형상이라는 형태로 개별 내부에존재한다고 합니다.

 

한편 추상 개념, 예를 들어 인간다움이라는 개념은 여러 사람들이 가진 공통된 속성을 추출해 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개별적인 사람들보다 먼저 존재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보편은 개별 뒤에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신이 갖고 있는 관념, 이데아에 대해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인간의 모습에 대한 관념을 신이 갖고 있지 않다면 인간을 창조할 수 없는 것처럼, 신이 갖는 관념은 모든 개별적인 사물이 존재하기 전에존재해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아퀴나스는 세 가지 얘기를 다 하는 셈입니다. “형상으로서 보편은 개별 속에 존재한다. 또 추상적 개념으로서 보편은 개별 뒤에 존재한다. 그리고 신의 관념으로서 보편은 개별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이름일 뿐인 보편자(추상적 개념)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지만, 사실은 그걸 제외하면 보편자는 실재한다는 주장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보편 개념만 이름이고, 다른 보편자는 실재한다는 실재론의 입장입니다. 어찌보면 (추상) 개념만이 개념(이름)이고 다른 보편자는 실재라는 주장이고, 덧붙여 근본적인 보편자(중세의 이데아’)는 개별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루앙 대성당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 중 하나가 루앙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Rouen)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요새와 같은 방벽으로 신의 나라를 둘러치고 있었다면, 고딕 양식은 빈 틈 하나 없이 창문과 조각상으로 가득한 벽, 스테인드 글라스로 채워진 창, 찌를 듯이 솟은 뾰족탑과 교차 늑골로 받쳐진 아치 등으로 신의 나라를 과감하게 장식한다. 프랑스에서 주로 발달한 이 성당들은 대개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었고, 그래서 대부분 이름에 노트르담’(Notre-Dame)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꼽추 카지모도 때문에 유명해진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노트르담 드 파리‘(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빅토르 위고의 소설도 원래 제목은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였다. 나중에 이러한 양식에 변형을 가한 성당들이 많이 지어지는데, 후기고딕 양식이라고 하며, 주로 영국에서 크게 발달했다.

  

 

윌리엄 오컴

 

 

반대로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이라는 사람은 당시의 유명론자로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편 개념은 기호다. 이 기호에 상응하는 실재는 없다. 사물에 앞서가는 보편자는 신의 정신 속에도 없다.

 

 

예를 들어서 추상적인 언제’ ‘어디같은 것은 실재하지 않으며, 오직 구체적인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만이 실재한다고 합니다. 관련된 사물들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을 떠난 관계라는 추상적인 존재란 없으며, 1, 2, 3 같은 숫자들은 실재하지만 일반적인 라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결국 보편 개념은 이름일 뿐이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컴은 이런 논리가 기독교 교리에까지 적용된다면, 신학적 교의 자체가 붕괴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이 교리 자체의 처참한 붕괴를 피하려고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그로 인해 자신에게 가해질 교회의 탄압을 피하려고 그랬던 것인지, 그는 이러한 주장을 오직 이성이 작용하는 영역에만 한정시켜 버렸습니다. 이성과 달리 믿음은 불합리한 것이고”(credo quia absurdum), 믿음의 영역인 신학에는 앞서와 같은 이성의 논리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옵니다. 개별적인 대상을 경험하는 데서 말입니다. 그런데 신에 대한 경험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에 대한 고유한 지식 역시 불가능하며, 따라서 믿음은 불합리하다고 합니다.

 

이로써 오컴은 신학을 합리적 이성으로부터 떼어내고, 철학과 신학을 분리시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신학적 원리에 따라 철학을 통해 신의 섭리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스콜라철학을 해체시키고 철학과 신학을 분할하려고 합니다.

 

이미 후기에 이르러서인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인지, 이런 주장 정도는 논란은 되었을망정 그로 인해 화를 당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신학과 이성이란 영역이 서로 별개라면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교황은 세속정치에 굉장히 깊이 관여하고 있었는데, 오컴은 이것까지 비판합니다. 그 때문에 그는 교황에게 잡혀 투옥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해서, 당시 교황과 다투고 있던 바이에른 주의 루드비히 왕 밑에서 은신합니다. 오컴은 이때 당신이 칼로써 나를 지켜주면 나는 펜으로써 당신을 지켜주겠다고 하여, 또 하나의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카루스의 추락

고딕성당은 당시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그것은 신이 계신 저 하늘을 향해 무한히 상승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신에게 가까이 기려는 인간의 이러한 욕망은 성당을 좀더 높이 짓기 위한 경쟁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보배(프랑스)에서는 성당이 통째로 무너져 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벨탑? 하지만 그처럼 신과 맞먹으리는 시도라기보다는 신에게 좀더 가까이 가보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태양을 향해 좀더 높이 올라가려다 주락한 이카루스의 비극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 그림은 브뤼겔(Bruegel)이카루스의 추락이라는 동명의 그림을 위해 그려 보았던 판화인데, 약간 아래에 날개를 달고 있는 사람이 이카루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다. 이카루스는 태양에 더 가까이 올라가 있는데, 이미 날개를 붙인 밀납이 녹이 몸이 균형을 잃은 탓에 막 추락하려 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우연일까? 이카루스를 그린 브뤼겔은 바벨탑을 건축하는 장면을 최소한 세 번을 그렸고, 그 중 둘은 유명한 그림으로 남아 있다. 브뤼겔 자신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싶었던 것일까?

 

 

유명론과 경험주의

 

 

지금까지 우리는 중세철학에서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을 살펴보았습니다. 근대철학, 특히 경험주의를 다루는 자리에서 이토록 장황하게 중세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찌보면 뜬금없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유명론과 경험주의의 관계를 본다면 이런 장황함은 용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알다시피 유명론은 중세 전체를 지배한 실재론에 대한 반대로서 제기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데아와 유사한 보편자가 세계를 만들어내고 움직인다는 사고에 대한 반대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데아와 같은 관념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관념론에 대한 비판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반대는 주로 개별적인 사물이나 현실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예컨대 하늘에 떠다니는 이데아나 관념에다가 사물을 꿰어 맞추는 게 아니라, 땅 위에 있는 저토록 다양한 사물들을 올바로 관찰하고 그것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써 올바른 지식은 만들어지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명론자들이 개별적인 사실에 대해 정확하게 관찰하고 경험하는 걸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입니다. 경험적 연구나 관찰과 무관하게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신학적 원리에 따라 해석하고 꿰어맞추는 스콜라철학과는 반대로, 개별 사실들을 강조하고 그것이 원리에서 벗어난다면 벗어나는 대로, 있는 그대로 인식하자는 견해가 생겨 나오는 것은 바로 이 유명론적 전통 속에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명론이 어떤 관념이나 보편원리로써 전체를 다 설명하려는 경향에 대해 해체적이고 비판적인 효과를 갖는다는 건 분명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전에는 신학적 원리나 신의 말씀에 맞는 한에서만 사실이나 경험이 유의미했다면, 이제는 종종 그러한 원리로는 설명되지 않으며 때론 정면충돌하기도 하는 사실들에 일차적인 중요성을 두자는 것입니다. 사실 유명론이 가능했던 것 자체가 신학적 원리에서 벗어나는 사실들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초기의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이 후기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으로 바뀐 것 자체가 그런 요소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명론이 점점 목소리를 키워가고 있다는 사실은 경험이나 경험적 지식에 대한 지적인 개방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접하고 경험하는 구체적 사물, 구체적 지식에 대한 개방 말입니다. 이런 생각이 경험주의라고 부르는 흐름에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은 대개 다 알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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