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는 실천을 통해서
셋째는 진리의 문제입니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두번째 테제에서 맑스는 인간이 대상적 진리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오해가 많이 되는 구절입니다. 흔히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안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져, 참인가 아닌가는 실천해 보면 안다라는 식으로 해석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유물론에서 진리를 검증하는 방법으로 간주된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실천 개념은 사실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검증 개념과 별로 다르지 않지요. 그러나 맑스 말대로 대상이나 지각이 ‘실천’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혹은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 똑같은 사물도 다른 것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길고 짧은 걸 대보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부시맨의 콜라병 얘기를 했지요? 부시맨에게 그가 들고 있는 게 콜라병이란 걸 말만으로,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람을 노예로 다루어선 안 된다는 걸 설득하기 위해 휴머니즘이니 뭐니 하는 온갖 이론적 수단을 동원한들 그를 설득할 순 없을 겁니다. 그건 마치 농부에게 소를 노예처럼 일 시키고 부리면 안 된다는 걸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만약 부시맨 A가 콜라 먹는 행위를 자주 보고, 또 자기도 따라 마셔 본다면, 그게 콜라병이란 걸 이해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콜라병이란 판단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다른 부시맨 B가 있어, 그는 그 물건을 호두를 까먹는 데 사용했다고 합시다. 그럼 그는 그 병을 호두 까는 도구로 파악할 겁니다. 즉 그는 실천적으로 그 물건이 호두 까는 도구라는 걸 증명할 수 있겠지요. 또 다른 부시맨 C는 그 병에 입을 대고 불어봤다고 합시다. 그럼 그는 그 병에서 소리가 나는 걸 듣고 그 물건을 물소 뿔피리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할 겁니다. 그걸 실천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이는 앞서 맑스의 테제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A, B, C 세 부시맨 각각은 나름의 ‘실천’ 속에서 그 물건이 무엇인지(대상) 인식합니다. 그리고 실천 속에서 그것이 콜라병인지, 호두까기인지, 뿔피리인지 검증합니다. 따라서 이 세 사람의 부시맨이 모여서 이 물건은 무엇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면 아마 그 논쟁은 끝없이 계속될 겁니다. 이때 이게 어째서 콜라병인지 이론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각자 자기 식의 실천을 통해 자기 주장을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요(여기서 실천을 통해 그게 콜라병이라는 판단이 진리임을 검증할 수 있다는 생각처럼 순진한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맑스는 이제 진리의 문제를 현실성과 힘, 차안성을 입증하는 문제로 바꿔 버립니다. 그 물건에 대해 ‘영원한 진리’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떤 판단이나 지식의 현실성과 타당성(옳음)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부시맨 B가 호두까기로 그 물건을 계속 사용한다면, 그리고 그게 매우 훌륭한 도구임을 입증한다면, 그 판단은 현실성과 힘을 입증한 셈이지요. 뿔피리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옳음’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반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면, 그리고 그 문제들이 심각한 것이라면 ‘옳다’는 판단은 유지되기 힘들 겁니다.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함께, 근대적인 진리 개념으로부터의 근본적인 전환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이는 나중에 보겠지만, 비트겐슈타인의 그것과 유사합니다).
▲ 빈민들의 놀이터
구스타브 도레(Paul Gustave Doré)의 그림 「더들리 가」(Die Dudley Stree)다.
더들리 가는 19세기 중반 영국의 빈민 거주지역 중 하나였다. 길거리엔 아이들이 가득하고, 집의 문들은 거리를 향해 열려 있어서, 저 뒤에서 아이들을 헤치며 오고 있는 마차만 없다면 거리인지 집 안인지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다. 거리는 마치 많은 집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거대한 거실처럼 보인다. 이 정도는 아니라 해도, 19세기 건반까지만 해도 거리는 ‘빈민들의 놀이터’였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거리에서 공을 가고 노래를 부고 카드놀이를 했다. 사실 내가 살던 1970년대 서울의 ‘골목’도 다르지 않았다. 그곳은 적어도 동네 아이들이 만나고 어울리며 함께 놀던 ‘놀이터’였고, 생소하고 이질적인 사람과 만나고 어울리는 하나의 ‘세계’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박애주의자’라고 자칭하던 부르주아들은 골목과 거리에서 사람들의 삶을 몰아내 버렸다. 그들이 보기에 그곳은 빈민의 아이들이 모여서 범죄를 배우고 갱단을 만들기도 하는 범죄의 온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를 깨끗이 ‘청소’해 버렸다. 대부분의 도시들이 거리에서 공을 차거나 도박, 음주, 고성방가를 하면 체포하고 구금할 수도 있는 조례(條例)들을 만들었다. 이제 아이들은 집 안으로 쫓겨 들어가고, 기리는 저 아이들에 가려 주춤대고 있는 마차, 아니 자동차들이 다니는 공간, 그리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나가는 통과 공간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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