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을 통한 언어학습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크게 두 가지의 시기로 나누어집니다. 초기의 사상은 『논리철학논고」라는 책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성전처럼 떠받드는 고전이 되는 책이지요. 한편 후기의 사상은 사후에 출판된 『철학적 탐구』라는 책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초기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론과 생각들을 해체하고 부정하며 전혀 다른 입장으로 선회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이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은 반영론과 비슷합니다. ‘그림이론’이라고도 하는데, 단어는 사물의 ‘이름’이고, 문장은 어떤 상황에 대한 ‘그림’이라고 합니다. 명제들은 물질이 원자로 나누어지듯이, 요소명제로 나누어지며, 이 요소명제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리고 명제 전체의 참과 거짓은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라고 합니다. 즉 고등학교 수학책에 나오는 진리표를 통해 어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다는 거지요.
반면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단어가 사물의 ‘이름’이라는 것부터 부정합니다. 예를 들어 ‘그리고’나 ‘언제’처럼 이름 아닌 것이 대부분이란 거지요. 그렇다면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단어의 용법(use)이라고 합니다. 즉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의미는 결정된다는 겁니다. 어떤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법(용법)을 배우는 것이란 말이죠. 예컨대 아까 말한 mother나 now, when, general 등 모든 단어를 그 영국인이 사용하는 것을 반복해서 보고, 그걸 어떤 경우에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배움으로써 그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구조언어학과 실증주의의 간극을 가볍게 뛰어넘어 버리는 새로운 견해입니다.
잠시 water라는 단어를 생각해 봅시다. 알다시피 ‘물’이란 뜻이지요. 그런데 똑같은 이 한마디의 말이 그게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예컨대 만약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물병을 가리키면서 “water”라고 했다면 ‘이건 물이야’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water라는 단어를 배운 꼬마가 밥을 먹다가 “water”라고 말한다면 그건 ‘물 줘’라는 뜻이겠지요. 또 낙타를 타고 긴 사막을 가던 어떤 대상(隊商)이 “water”라고 말하는 것은 ‘물이다! 이젠 살았다’라는 뜻입니다. 반면 홍수가 나 지붕 위까지 피신했던 사람이 “water”라고 소리친다면 그건 아마 ‘물이 여기까지 왔다. 이젠 죽었구나!’라는 뜻일 겁니다. 또 공사장에서 “water!”라고 외치는 것은 ‘여기 물 좀 부어줘’라는 뜻이겠지요.
이런 의미의 차이는 동일한 단어가 상이한 맥락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물론 구조주의자라면 단어들의 응축이 이뤄지는 경우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동일한 단어에 상이한 단어들이 응축되고, 또 그 동일한 단어를 통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응축된 상이한 단어를 읽어내고 이해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언어를 어떻게 습득하는가 하는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언어를 배우려면 최소한 두 가지 요소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는 단어들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입니다. 구조주의자 입장에선, 단어의 의미는 랑그라는 전체적 규칙을 알아야, 그리고 다른 단어들을 알아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먼저 배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반면 기본적인 단어들도 모르면서 랑그를 습득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랑그를 배우려면 단어들의 의미부터 먼저 배워야 합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이나 구조언어학에선 이 악순환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단어를 몰라도 규칙을 배울 수 있으며, 규칙을 몰라도 단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용법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실천을 반복함으로써 배울 수 있다는 겁니다. 규칙 역시 마찬가집니다. 소쉬르가 말하는 랑그처럼 항상 이미 존재하는 통일적이고 완결적인 규칙의 체계가 있는 게 아니라, 언어적 실천 속에서 사용되는 부분적인 규칙들이 있는 것입니다. 전체 규칙의 체계를 몰라도 이 부분적인 언어사용 규칙은 그것을 사용하는 실천을 통해서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말의 랑그 전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언어사용 규칙을 모른 채 언어를 사용한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두드러진 예를 들어보면, 미국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한국인은 영어의 문법을 거의 모르지만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말 정도는 사용해서 장사를 합니다. 우리도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의 말을 대략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집니다. 문법책을 붙들고 20년 공부한 사람보다 차라리 과감하게 뛰어들어 되든 안 되든 영어를 사용해 본 회사원이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오늘밤…….
① 라 투르(La Tour), 「성 세바스찬을 돌보는 성 이렌」
② 베어메어(Jan Vermer, 「레이스를 짜는 여인」(The Lacemaker)
③ 도미에(Honoré Victorin Daumier), 「담소하는 3인의 변호사」(Three Lawyers)
구조 언어학이나 그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기호와 대상의 관계, 기호와 기호의 관계를 고려했다. ‘자의성’이니, ‘차이의 놀이’니, ‘랑그’니 하는 개념들도 그 두 가지 축으로 만들어진 좌표 안에 있었다. 그러나 기호의 외부는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가령 첫 번째 「성 세바스찬을 돌보는 성 이렌」에서 성 세바스찬의 손목을 잡은 여인이 침울한 어조로 “오늘 밤…….”이라고 말했다 하자. 그것은 아마도 “오늘밤 돌아가셨습니다”를 뜻하는 것일 거다.
두 번째 「레이스를 짜는 여인」(The Lacemaker)에서 레이스를 짜는 여인이 조용하지만 이에 약간 힘을 준 어조로 말했다고 하자. “오늘밤……….” 아마도 “오늘밤엔 기필코 끝내야지”를 뜻하는 것이리라.
다시 세 번째 「담소하는 3인의 변호사」(Three Lawyers)에서 징그런 표정으로 웃고 있는 변호사 중 한 명이 약간 느끼하면서 윗니가 울리는 목소리로 “오늘밤”이라고 말했다 하자, 필경 “오늘밤 김마담 집에 가자구”를 뜻하는 것일 게다.
아마 이외에 다른 그림 골라서 똑같은 말풍선을 단다면, 대개 다른 의미의 문장이 될 것이다. 이 경우 동일한 하나의 기표가 전혀 다른 의미의 문장들을 언표한다. 그 차이는 랑그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다. 상이한 어조와 상황, 그리고 용법이 그런 차이를 만든다. 즉 기호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기호 내부적인 게 아니라 기호 외부적인 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배우를 뽑을 때, “오늘밤”이란 한 단어로 30개의 상황을 표현해 보라고 했다는데, 이는 30개의 다른 문장을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기호의 의미에서 일차적인 것은 차라리 이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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