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배달부, 그리고 주체화
앞서 타자는 편지를 통해 나의 위치를 지정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좋으나 싫으나 이미 지정된 ‘내 자리’인데, 이걸 굳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즉 왕비가 도둑질하는 장관을 그 자리에서 제지하고 질책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런 편지가 왕비에게 없으리라는 왕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게 됨을 뜻합니다. 즉 왕비로서 인정받아야 할 중요한 것을 인정받지 못하고 맙니다. 따라서 이런 불행한 사태를 바라지 않는다면, 왕비는 편지로 인해 지정된 자리를 자기 자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왕으로부터 ‘훌륭한 왕비’로서 계속 인정받고자 한다면, letter가 지정하는 자리를 자기 내부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라캉은 에스(ES)라고 합니다. 독일어로서 흔히 이드로 번역되는 것이고 저는 ‘거시기’로 번역했던 게 이건데, 라캉은 그런 번역어들이 갖고 있는 생물학주의적 요소에 반대해 단지 ‘그것’(ça)을 지칭하는 말로 그냥 사용하며, 또한 주체(subject)의 머릿글자를 뜻하는 에스(S)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왕비가, 타자(관계)가 지정하는 위치를 ‘내 자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 왕비로서 걸맞는 이상적인 상(像)에 자신을 동일시(identification)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왕비의 행동을 좌우하는 이상적인 상을 ‘자아의 이상’(ego-ideal)이라고 합니다. 역으로 왕비의 행동은 이 자아의 이상에 동일시하는 것인 셈입니다. 즉 왕비가 소설 속에서 맡은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이 자아의 이상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서죠.
앞서의 얘기로 도식을 설명하면, 대문자 타자(Other, 이를 ‘큰 타자’라고 합시다)는 왕비(me)의 자리를 지정합니다(me←Other), 그리고 왕비는 왕비로서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이 큰 타자가 지정해 주는 자기 자리를 받아들입니다. 그 자리를 자기가 받아들임으로써 왕비는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S←Other). 에스가 주체의 약자인 S를 뜻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욕구가 소외되는 것을 뜻하며, 이런 의미에서 결핍(빈자리)을 야기합니다(S→0). 작은 타자라고 불리는 object(o)는 바로 이런 근원적으로 채울 수 없는 결핍을 지시합니다.
이 빈자리를 채우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빈자리를 메울 욕망의 대상들(이 역시 ‘작은 타자’라고 부릅니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원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대상을 통해 욕망이 충족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대상의 치환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머물 수 없는 것이기에, 대상의 끊임없는 환유연쇄가 나타나지요. 정확히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치명적인 도둑질도 못 본 체 해야 했고, 때로는 경찰을 시켜 장관의 집을 뒤지게 하기도 했고, 때로는 장관의 요구를 싫어도 받아들여야만 했던 왕비의 태도를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다양한 모습들 각각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상상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O → me), 즉 그게 바로 ‘나’라고 ‘오인’함으로써 타자에 의해 주어진 나의 자리(me)를 채워가는 거지요.
Es(S) | other(o) | |
⤪ | ||
me | ← | Other |
큰 타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letter는 왕비를 주체화시킴으로써, 그리고 그것에 상응하는 다양한 대상들에 대한 왕비 자신의 동일시를 거쳐, 큰 타자가 애초에 지정한 자리에 배달된다고 합니다. 즉 S와 o를 거쳐 이미 지정된 me의 자리에 배달된다는 거지요. 이로써 왕비는 전체 관계 속에서 자기에게 배정된 역할을 자신의 일로 알고 수행하게 된다는 겁니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