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와 ‘표상체계’
둘째로, 과학으로서 맑스주의를 정립하려는 기획과 동시에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개념적 발전을 기획합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대중들의 무의식적 표상체계’로서 정의하는 것입니다.
‘표상’은 representation을 번역한 말인데, 알다시피 represent는 ‘표상하다’는 뜻말고도 ‘재현하다’ ‘대표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상한다는 말은 ‘눈앞에 떠올린다’는 뜻인데, 예컨대 ‘자동차’란 말을 듣고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떠올리는 경우나, 역으로 어떤 물체를 보고 ‘컴퓨터’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는 단어를 통해 사물을 눈앞에 재현하거나, 사물을 보고 그에 상응하는 단어를 머릿속에 재현하는 것이지요.
그럼 표상체계란 무엇일까요? 예컨대 이 물건을 보고 ‘책’이라고 판단함으로써 우리는 이 물건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못 먹을 것’이란 개념만으로 판단하는 어린 아기라면 그걸 입으로 가져가겠지요. 또 제가 지금 이렇게 강의하는 것은 여러분에 대해 제가 강사라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한편 어떤 행동을 하거나 판단을 하는 것은 언제나 특정한 표상과 함께 진행됩니다. 일관된 표상이 없으면 일관된 판단이나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제가 지금 이 자리를 연극무대라고 떠올린다면, 또 잠시 후에 선거연단이라고 생각한다면 제 행동은 어떤 일관성도 동일성도 갖지 못한 채 뒤죽박죽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무언가를 떠올리도록 해주는 개념이나 상상, 판단의 체계를 ‘표상체계’라고 합니다.
이러한 표상체계는 개인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대개 집단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지거나, 학교나 교회 등 제도적 장치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식당에서 흑인을 보고 등을 돌리는 남부의 미국인이나, 십자가를 보면 자세를 가다듬는 기독교도들을 생각해 보세요. 남부의 미국인라면 대개 다 그럴 거고, 기독교도라면 대개 다 그럴 거란 것을 알 수 있지요.
또한 이런 표상체계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합니다. 예컨대 방 청소를 한다고 합시다. 바닥에 있는 책을 보고 “이건 책이고, 책은 책장에 꽂혀 있어야 하니 이건 책장에 꽂아두자” 하진 않을 겁니다. 「미시시피 버닝」이란 영화에는 어린 꼬마들도 흑인은 하찮은 존재고 경멸받아 마땅하다는 태도를 보이는 게 나옵니다. 이건 그 아이들이 사고하고 의식해서 하는 판단이 아닙니다. 의식은 이 표상체계 안에서 일어나며 표상이 의식에 선행합니다. 즉 표상체계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합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대중적인 표상체계’라고 이해합니다. 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대중은 나는 한국인이야 ‘나는 대학생이지’ ‘나는 김씨 가문의 아들이지’ 따라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해’라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받았으니 그만큼 일을 해주는 건 당연해’라는 판단도 그렇습니다.
맑스주의에서는 이데올로기를 지배계급의 이념으로, 따라서 그것은 피지배계급에겐 ‘허위의식’이요 거짓이고, 지배계급이 없어지면 사라질 것으로 보았지요. 또한 그것은 의식적인 것으로서, 계급의식의 일종으로서 파악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본 것처럼 알튀세르는 이것이 무의식적인 것임을 주장하며, 또 그것 없이는 이 사회에서 내가 선 자리는 무엇이고, 거기서 무얼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사회(심지어 공산주의사회)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없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없는 무의식 개념을 프로이트에게서, 아니 좀더 정확하게는 라캉에게서 끌어옵니다. 그리고 대중적인 표상체계인 이데올로기 속에서 개개인이 어떻게 주체로 만들어져 가는가를 분석합니다. 라캉이 무의식(타자)을 통해서 어떻게 개개인이 주체로 되어 가는지를 분석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요컨대 이데올로기 없는 주체는 없으며, 이데올로기 없는 실천도 없다는 것입니다. 표상체계로서 이데올로기는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사라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대한 상상적인 체험이기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변형시키고 왜곡시켜 보여주지요. 이래서 알튀세르는 현실은 결코 투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만약 그의 말처럼 이데올로기가 영원한 거라면 이러한 변형과 왜곡 역시 영원하단 말이겠지요?
바로 여기서 알튀세르의 이중적 기획은 난관에 봉착합니다. 앞서 첫 번째 기획은 맑스의 역사유물론을 ‘과학’으로서, 진리로서 위치를 확고히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데올로기와의 단절을 거치면 대상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하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지요. 반면 지금 말한 이데올로기론의 기획에서 나온 결론은 어떤 대상도 결코 투명하지 않으며, 오직 이데올로기 속에서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상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되죠. 따라서 어떤 순수한 과학도 불가능하며, 과학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 속에 있거나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즉 두 가지의 동시적 기획이 서로 충돌함에 따라 알튀세르의 배는 난파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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