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유물론
맑스가 실천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야기된 철학적 지반의 변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라는 근대철학의 목표는 물론, 대상 자체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지 파괴하는 데 머문 것만은 아닙니다. 물질 개념조차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역사유물론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역사유물론으로 진전됨에 따라 이제 맑스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주체(또는 인간)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맑스는 ‘인간’이란 개념 자체를 해체합니다. 그는 ‘인간’이란 포이어바흐처럼 사랑이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존재로 정의될 수 없으며, 데카르트처럼 ‘이성’과 ‘정념’을 가진 존재로 정의될 수도 없다고 하죠.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갖는 수많은 특성 중 몇 가지를 추출해서 인간의 본질이 그거라고 선언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사람마다 인간은 다르게 정의될 수 있을 겁니다.
맑스가 보기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개인들이 어떤 사회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적으로 말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입니다.
앞에서 「비지터」(The Visitor)란 영화 얘기를 했지요? 그 영화에는 영주의 후손과 시종의 후손이 나왔습니다. 영주는 중세 때 한 지방을 지배하던 귀족이요 지배자입니다. 시종은 그에게 딸린 노예 같은 존재고 말입니다. 한편 20세기에 사는 영주의 후손은 더 이상 귀족도 영주도 아니며 지배자도 아닙니다. 시종의 후손은 호텔을 경영하는 부르주아고요.
맑스로서는 이들이 갖는 (생물학적) 공통성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종적 공통성으로 말한다면 영주와 시종 간에도 별다른 차이가 없으니까요. 오히려 중요한 건 똑같은 생물인 그들이 누구는 영주로서 지배하고, 누구는 시종으로서 지배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같은 핏줄을 타고난 후손이 20세기에는 더 이상 귀족으로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개인들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 차이들입니다. 이런 뜻에서 맑스는 말합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다시 말하면, “톰은 톰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시종이 된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 말이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란 명제의 뜻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이란 선천적이고 항구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비지터」(The Visitor)의 끝부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영주는 시종을 데리고 다시 중세 시절로 돌아가려 하지만, 자유로운 공기를 맛본 시종은 돌아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시종은 자기 후손인 호텔 주인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 대신 중세로 돌려보냅니다. 중세로 ‘끌려간’ 시종의 후손은 그를 부리는 영주를 보며 어이없어 하지만,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가 명령에 따르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걸 요구하기도 하며, 그렇지 않을 때는 비난과 징벌이 날아드니까 말입니다. 그는 이제 싫으나 좋으나 시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는 상이한 사회관계 속으로 밀려들어감에 따라 시종으로서 살아가게 된 겁니다. 마치 아프리카의 자유인이 백인 손에 잡혀 미국으로 옮겨지는 순간, 좋든 싫든 노예가 되듯이 말입니다. 요컨대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면, 사회관계가 달라지면 그 본질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맑스는 순수한 ‘인간’, 항구적이고 불변적인 인간 개념을 해체해 버립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동떨어져 인간을 정의하거나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파밀리스테르의 아이들
파밀리스테르의 탁아소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새로 시작한 공동육아 또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파밀리스테르를 군대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공산주의적 병영이라고 비난했을 뿐 아니라, 여기서 이루어지는 공동육아에 대해서 “아이를 양육할 신성한 권리를 부모로부터 빼앗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 당시는 물론 20세기 들어서까지 노동자의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양육될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공장으로 광산으로 일하러 가야 했고, 일이 끝난 뒤에는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방치되어야 했다. 당시의 노동자들은 누구도 아이를 양육할 신성한 권리는 커녕 양육할 시간도, 양육할 공간(주거)도, 양육할 돈도 갖지 못했다. 따라서 그 비난은 아마도 양심도 양식도 없는 사람이, ‘공동’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느끼는 공포와 증오를 표현한 것이거나, 아니면 이들의 새로운 시도가 갖는 영향력을 시기하여 퍼붓는 욕이었다고 해도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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