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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6. 들뢰즈와 가타리 : 차이의 철학에서 노마디즘으로, 차이의 반복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과 굴뚝청소부, 제6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근대 너머의 철학을 위하여 - 6. 들뢰즈와 가타리 : 차이의 철학에서 노마디즘으로, 차이의 반복

건방진방랑자 2022. 3. 27.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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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반복

 

 

그러나 차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차이의 철학 역시 동일성이란 개념을, 우리의 사유 속에 존재하는 동일성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들뢰즈는 여기서 양자의 관계를 전복하고자 합니다. 동일한 것을 모으곤 거기서 다시 차이를 구별하거나, 차이를 동일성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일성마저 특정한 제한과 조작을 통해 동일화된 차이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반복이란 개념입니다.

 

반복이란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내 눈앞에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역사적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며, 실험실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풍잎을 단풍잎이라는 동일성의 형식으로 포착하지만, 그것은 사실 내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단풍잎들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고 그 이름에 따라 동일한 것으로 포착하는 거지요. 여러분이 이진경이란 이름으로 저에게서 하나의 동일성(identity)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나 대충 보는 사람에겐 동일하게 보이는 것에도 사실은 항상 미묘한 차이들이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노래할 때마다 한영애의 목소리는 다른 소리로 반복됩니다. 대충듣는 사람에게만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로 들리지요. 모네의 눈에 수련이나 루앙성당은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네는 거기서 미세한 차이를 보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지요. 우리 눈에 동일하게 보이는 루앙성당을 그는 20여 장의 다른 모습으로 포착하여 그려 놓았습니다.

 

반복이란 사물이나 사실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그것을 대면하는 어떤 시선이나 정신을 통해서 그것들이 하나로 연결될 때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무상한 변화 속에 존재하는 한 어떤 것도 차이 없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반복은 언제나 차이의 반복일 뿐입니다. 모네의 눈 속에 수련이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듯이, 우리의 눈앞에 단풍잎은 언제나 다른 색깔, 다른 모습으로 반복하여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반복은 차이의 다른 이름이며, 차이를 포함하는 반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대충 보며 그 모든 반복을 유사성이나 유비, 대립이나 공통성을 통해 동일한 것으로 포착합니다. 그 결과 반복에 포함된 차이는 망실되고, 반복되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 표상됩니다. 좀더 나아가 그처럼 다른 것들 가운데서 공통된 것을, 변화하는 것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법칙과 영원성의 이름으로 찬양되고 고무됩니다. 철학이 불변의 실체를 추구하듯이, 종교는 이 무상한 변화로부터 벗어난 영원한 피안을 추구하고, 과학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항상적인 법칙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가령 실험은 이와 관련해 중요한 사례를 제공합니다. 실험이란 어떤 현상에 관여된 수많은 변수들을 제거하여 가정된 어떤 하나의 변수만으로 제한해, 그 변수가 바로 그 현상을 만들어내는 원인임을 보여주려는 방법입니다. 예컨대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피우지 않는 사람을 실험집단으로 나누어 그 결과를 비교합니다. 두 실험집단 간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난다면,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알다시피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담배를 피워도 폐암에 걸리지 않는 사람도 있고, 담배를 안 피우는데도 폐암에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담배가 어떤 신체와 만나는가, 어떤 다른 요인들과 결합되는가 등에 따라 그 결과는 매우 다양하게 달라지는 거지요. 그러나 실험은 이 모든 차이를 만드는 원인들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오직 담배와 폐암이라는 두 변수 사이의 관계만을 분리시켜 관찰하여 담배에는 원인, 폐암에는 결과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거지요. 원인 속에 존재하는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동일한 결과의 반복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생명의 경계

공각기동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인형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프로그램이 자신이 생명체임을 주장하며 망명신청을 하는 장면이다(첫 번째 사진). 여러 가지 공작을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지만, 네트의 바다를 떠돌면서 다양한 요소에 침투하여 활동하기도 하고, 조건에 따라 수많은 복제를 만들기도 하며, 의체에 들어가서 그것을 움직일 때는 소위 고스트와 다를 바 없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자각한 그는 자신이 생명체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어떻게 생명체일 수 있는가라는 인간들의 반문에, 그는 인간이 컴퓨터에 의해 기억을 조각하게 되었을 때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어야 한다고 응수한다(두 번째 사진), 핵산의 화학적(기계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유전 메커니즘,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유전적 기억과 복제의 메커니즘이 생명이란 프로세스의 핵심이란 것이 분명해졌을 때, 그리고 기계적인 장치로 기억과 복제, 혹은 심지어 프로그램의 자기증식과 변형마저 생명체 외부에서 가능하게 되었을 때, 생명과 기계를 대비하는 익숙한 생명의 정의를 지워버리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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