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의 철학
이처럼 배치 내지 관계는 그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특정한 욕망으로 ‘끌어들입니다’(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화territorialization 한다’고 표현합니다), 자본의 배치는 착한 사람이든 계산에 밝은 사람이든 증식욕망으로 영토화합니다. 사랑의 배치는 쑥맥인 사람도 열정적인 구애의 욕망으로 영토화합니다. 이 영토화하는 성분이 계속 작동하는 한, 그 배치는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겠지요. 배치를 유지하고 보존하게 하려는 힘으로 작용하는 한, 욕망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특정한 양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하는 ‘권력’으로 작용합니다. 증식 욕망은 자본의 배치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을 화폐에 눈이 먼 사람들로, ‘자본가’로 살아가게 하는 강력한 권력이 되어 작동합니다. 사랑에 눈 먼 사람이 ‘사랑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이 역시 사랑의 배치 안에서 사랑의 욕망이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지요.
이런 이유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과 권력이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는 욕망이 권력을 욕망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욕망이 바로 권력이다”라는 거지요. 따라서 모든 배치가 욕망의 배치라면, 그것은 또한 모두 ‘권력의 배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권력이 작동하는 배치, 권력에 의해 유지되고 지속되는 배치란 뜻이지요. 물론 욕망이 그대로 권력이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욕망이 어떤 상태를 유지하고 그 상태의 동일성을 지속하려는 힘이 될 때 그런 것이란 점에서 양자는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욕망이 특정한 조건 속에서 권력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들은 권력에 대해 욕망이 일차적이라고 보며, 모든 배치는 권력의 배치이기 이전에 욕망의 배치라고 말합니다.
권력은 욕망이 작동하는 모든 곳, 즉 우리 삶의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학교, 공장, 가족, 예술 등등, 권력은 그저 국가기구에 관련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결부된 모든 배치에서, 우리의 일상적 삶 자체에서 작동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거꾸로 일상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작동하는 권력을 포착하기 위해 이들은 이런 식으로 권력을 개념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닙니다. 이런저런 차이와 변화에도 불구하고 불변성ㆍ항속성ㆍ동일성을 유지하는 ‘구조’ 개념과 달리, ‘배치’란 개념은 계열화되는 항들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혹은 어떤 하나를 추가하거나 빼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종류의 배치로 변환되는 것이란 점에서 매우 큰 가변성을 향해 열려 있는 개념입니다. 어떤 항이 우연적으로 나타나 기존의 계열 속의 어떤 항에 접속되는 것만으로도 배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령 카메라에 연속적으로 작동하는 셔터가 달리게 되었을 때, 움직임을 이미지로 다룰 수 있는 새로운 배치가 출현합니다. 또 대포에 바퀴가 달리게 되었을 때, 성벽을 무력화시키고 전쟁의 전술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새로운 배치가 출현하지요.
이처럼 어떤 새로운 항의 추가나 제거, 대체, 혹은 순서의 변경 등을 통해 기존의 배치를 다른 것으로 변환시키는 지점을 ‘탈영토화의 첨점’이라고 말합니다. 기존의 배치에서 ‘벗어나는’(기존 배치를 ‘탈영토화하는’) 지점, 가장 빨리 벗어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물론 변환된 새로운 배치는 하나의 배치로서 자신을 유지하는 힘을 갖지만, 동시에 또 다른 배치로 변환될 수 있는 탈영토화의 첨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배치는 ‘영토성’과 더불어 ‘탈영토화의 첨점’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욕망과 혁명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혁명이란 기존의 관계를 전복하여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이를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을 사용하면, 기존에 주어진 배치를 전복하여 다른 배치로 변환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기존의 배치를 유지하는 욕망, 기존의 배치에 길든 욕망을 탈영토화하여 새로운 배치, 새로운 욕망으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디른 욕망의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이를 ‘탈주선’(line of flight)을 그린다고도 말합니다. 탈주란 기존의 배치 안에서 정해진 것, 고정된 것, 강제되는 것에서 벗어나 달리는 것‘이고, 기존의 지배적인 가치나 방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나 방법을 창안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탈주란 “세상에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세상으로 하여금 [기존의 세계로부터] ‘도망치게’ (벗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욕망은 배치로서 존재하지만, 어느 하나의 배치에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흐름이며, 이 흐름은 주어진 배치가 만들어 놓은 벽이나 선분(segment)들에 갇히지만 차면 흘러넘치며 다른 배치를 향한 탈영토화 운동을 야기합니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일차적으로 탈주적인 흐름이라고 하지요. 이들이 말하는 욕망의 이론을 종종 ‘탈주의 철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어진 세계에서 벗어나 그것을 바꾸어 버리고 주어진 벽을 벗어나 탈영토화 운동을 야기하는 탈주적인 욕망의 흐름은 혁명의 개념과 쉽게 연결됩니다. 혁명이 기존의 세계, 기존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탈주적인 욕망의 흐름에 의해 가능한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혁명이란 욕망이고 욕망된 것이기에 가능한 거라는 게 이들의 주장입니다. “의무로써 혁명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혁명은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다.” 욕망의 억압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욕망이 발동하여 작동하게 고무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혁명이 진정 강력한 힘을 갖고 추동하게 만드는 방법이란 거지요.
예를 들어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혁명이란 자본주의적 욕망의 억압이라는 부정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순 없으며, 그와 다른 욕망이 생성되어 작용하는 긍정적 과정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코뮨주의적 욕망이 발동하여 작동할 수 있는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문제라는 거지요. 기존의 관계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것은 이런 긍정적 과정이 없다면 폐허만을 남기는 부정에 머물고 말지요. 심지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새로운 관계나 배치를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긍정적 욕망의 촉발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욕망의 억압이라는 것에 머물렀을 때, 또 다른 금욕주의적 체제를 만들었을 때, 그것이 대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외면당하게 된다는 것을 붕괴한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는 잘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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