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배치
68년 혁명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사람뿐이겠습니까? 그것은 라캉이나 푸코, 알튀세르 같은 사상가는 물론, 유럽의 좌파운동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상생활을 사로잡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권력에 대한 전복, 욕망을 죄악시하고 억압하는 금욕적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던 이 혁명에 대해서 공산당을 비롯한 대부분의 ‘구좌파’들은 ‘소부르주아의 철없는 난동’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구좌파들이 대중들로부터 신망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며, 거꾸로 혁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국가권력 주변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 전반으로 권력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 욕망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혁명의 관념에서 벗어나 욕망과 나란히 가는 혁명을 사유하고 실행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접속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사유는 바로 이런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일차적인 주제는 바로 욕망과 혁명을 하나의 동일한 문제로 사고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그것을 대립시키는 이론들과 대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 책은 68혁명을 이론화한 것으로 평가받게 되지요.
사실 욕망이란 개념은 그와 짝을 이루는 ‘힘’과 더불어 들뢰즈의 철학에서 이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개념이었습니다. 욕망이란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그것은 니체의 ‘권력의지’라는 개념과 정확하게 상응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요. 힘의 방향을 결정하는 성분, 힘의 질을 결정하는 성분, 그게 바로 권력의지지요. 어떤 힘을 x라고 쓴다면, 욕망 내지 권력의지란 이 x에 부착된 채 그것을 방향짓는 미분적 성분 dx라고 쓸 수 있습니다. ‘미분적’이란 말 differential이 ‘차이’에서 파생된 형용사고 ‘차이적’이란 의미를 포함한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여기서 차이라는 개념이 갖는 중요성을 다시 확인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차이를 ‘이념’으로 다루기 위해 들뢰즈가 사용한 개념 역시 dx였다는 것(『차이와 반복』)을 혹시 안다면, 이는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개념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힘이란 ‘할 수 있는 것’(can)이라면 의지 내지 욕망이란 ‘하려고 하는 것’(will)입니다. 할 수 있다고 해서, 즉 힘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걸 아무 곳에나 사용하진 않습니다. 그 힘으로 그림을 그릴 건지, 글을 쓸 건지, 남을 두들겨 팰 건지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욕망이지요. 그러나 거꾸로 욕망은 힘에 의거해서 생기고 작동합니다.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 축구를 하고 싶다거나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그건 아주 미약한 강도를 가질 겁니다.
이를 이해한다면 욕망이란 모든 활동을 생산하는 추동력이며, 힘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것도 쉽게 납득할 수 있겠지요? 이런 이유에서 들뢰즈와 기타리는 욕망과 생산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두 개념을 합쳐서 ‘욕망하는 생산’(desiring production)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냅니다. 경제적인 차원의 생산이나 소비ㆍ분배 등을 생산하는 것도, 성적인 활동을 생산하는 것도 모두 이 ‘욕망하는 생산’이라고 말합니다. 그것들이 다른 것은 그러한 욕망하는 생산이 어디에 어떤 강도로 투여되는가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이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욕망에 대해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욕망이란 본질적으로 성욕이고, 그 성욕은 일차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성욕이며, 이로 인해 그 욕망을 거세하는 오이디푸스적 억압이 발생한다고 하지요. 그림을 그리거나 공부를 하거나 돈을 벌거나 ‘정치’를 하려는 모든 욕망은 이 성욕이 승화 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리비도의 사회적인 투여는 그것이 탈성욕화되고 승화되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거지요.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사회적 투여가 가족적인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거나 혁명운동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성욕이 승화된 것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반대로 말해야 한다고 하지요. 모든 욕망은 사회적이며, 가족적 투여에 대해 사회적 투여가 일차적이라고. 그것이 가족적 투여, 성적인 투여로 제한된 것은 부르주아 가족과 결부된 특정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무의식에는 부모가 없다. 무의식은 고아다”라고 합니다. 이로써 무의식은 사회ㆍ역사적이라고 말하는 셈이지요.
그런데 욕망은 ‘하고자 함’이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어떻게 하고자 함이라는 구체적 양태로 존재하지요. 돈을 벌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 키스하고 싶다, 먹고 싶다, 자고 싶다 등으로 말입니다. 즉 욕망 일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조건과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이런저런 욕망’이, 어떤 욕망이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과 만나는가에 따라 다른 욕망이 발생하고 작용하게 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령 애인과 만나면 안고 싶다거나 키스하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하고 그것이 사랑의 행위를 생산하지만, 요리와 만나면 먹고 싶다는 욕망이, 진열장에 놓인 멋진 상품들과 만나면 사고 싶다는 욕망이 발동합니다. 애인과 만나서 돈을 벌고 싶다고 욕망한다면, 그는 사실은 아직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아니면 자본관계 속으로 어떤 사람을 끌어들인 것이지요).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욕망이란 ‘나’라는 주체에 속하는 게 아니라 나와 만나는 것들에 속한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나와 그것들의 관계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어떤 것들과 계열화되는가에 따라 다른 욕망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물들의 계열화를 통해 어떤 관계를 표시할 때, 이를 ‘배치’(불어로는 agencement, 영어로는 arrangement)라고 말합니다. ‘사건’을 정의하는 ‘계열화’ 개념이 여기서는 관계를 표시하는 개념으로 변형되어 다시 사용되고 있는 겁니다.
욕망은 언제나 특정한 배치에 속하는 것이지 나나 어떤 인간 같은 주체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언제나 배치로서 존재하며, 거꾸로 배치는 언제나 욕망의 배치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화폐를 증식시키고 싶다는 ‘증식욕’은 맑스가 ‘자본의 일반적 공식’이라고 말했던 배치로 표현됩니다. 맑스는 이를 M-C-M′이라고 표시한 바 있지요(M은 화폐, C는 상품, M′=M+ΔM), 반면 화폐와 상품의 순서만 바꾼 소생산의 배치(C-M-C′)는 갖고 있는 걸 상품(C)으로 팔아서 다른 상품(C′)을 사고 싶다는 욕망을 표현합니다. 한편 누구든지 자본의 배치 안에 들어간다면, 그는 화폐의 증식을 욕망하게 되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게 됩니다. 성품이 착하던 사람도 이 배치 안에서는 오직 자본의 증식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런 사례를 주변에서 찾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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